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두 가지 종류의 노래 악보집이 있었다. 하나는 붉은 겉 표지를 열면 해설과 함께 흘러간 옛 노래들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나는 이 악보집을 공부 책처럼 연구하길 즐겼다. 즐거이 습득한 ‘두만강 푸른 물에’를 부를 때면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는 먼 산을 보시며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는 가슴이 두근 거려요.17살이예요’를 부를 때면 어머니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 듯 홍조를 띄며 웃으시곤 했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는 일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롱이자 효도였던 셈이다. 또 하나의 노래 악보집은 레코드 판과 함께 이태리 민요, 독일가곡, 오페라 아리아 등의 악보와 성악가 및 해설이 들어있는 명곡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