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뚜,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여보세요” 하는 작은 언니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다. “언니는 내가 죽어도 모르겠다. 통 전화도 안하고 언제나 내가 해야만 하나?” 반 투정이 섞인 나의 말에 미안해 하며 변명을 늘어 놓은 우리 언니.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구정이라 멀리서들 모여든 아들 딸 손주 손녀들에 둘려 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카들과 조카 사위 며느리 형부 등.. 고루 짤막한 통화를 하고 난 후 내 마음에 밝은 불이 켜진 듯 미소가 떠오르며 지난 시간의 시간들이 지
내가 즐겨 걷는 혼스비의 콰리 트랙 입구에는 뽕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요즘처럼 오디가 익는 철엔 오디 따먹는 재미로 부지런히 드나드는데 손 닫는 가지의 오디는 내 것이다. 물론 내 손이 닫지 않는 곳의 오디는 산새와 포섬들의 몫이리라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동물들의 먹거리를 염려하였던 것은 아니다. 펜리스의 오디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나는 그곳으로 오디를 따러 가기 전까지는 오디에 관한 한 어떤 풀지 못했던 한(?)이 있었다.어린 시절, 여름방학은 외가의 이모들에게 “아이고 우리 경아 조금만 빨리
먼동이 터 오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이른 아침에 수영장은 북적이는 사람들도 없고 심신을 감싸는 적막감이 오히려 환상적이며 멜랑콜리 하기까지 하다. 어느덧 한 갑을 돌아 두 번째 갑을 시작하건만 아직도 이팔청춘 때의 감수성을 잊지 못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수영복만 입고 물속에 온 몸을 담그고 있으니 비 맞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비 오는 날 물속서 듣는 빗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잘 차려 입고 잔뜩 모양을 내었다면 모를까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에 온전히 몸을 맡기니 물 위에 떨어지며 튕기는 빗소리는 더 싱그럽고 은은한 오케스트
눈이 펑펑 내린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이렇게 행복하게 걸어본 적이 얼마 만인가. 내가 평소에 생활하는 호주와는 완전 다르게 온 세상이 하얗다. 밤새 이대로 걸을 수 있다면 매서운 바람과 추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의 거리에 지금 나는 서 있다. 고국을 매년 한 번씩 방문하면서 어릴 적부터 겨울이면 어김없이 보아왔던 눈을 본다는 설렘과 함께 또 하나의 기쁨은 빠지지 않고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 일이다. 졸업 후, 우리는 벌써 강산을 세 번이나 넘었지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우정을 나누고 있다.나 자신보다 나
‘내 몸에 죽음의 입구와 출구가 함께 있다.’ 장석주의 시 한 구절이다. 우리 집 부엌에는 찻장이 붙은 벽이 끝나는 곳에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문을 나는 뒷문이라고 부른다. 뒷문을 열고 내다 보면 높게 솟은 2그루의 측백나무 옆으로 쓰레기통 3개가 놓여 있다. 검은 몸체에 빨간 뚜껑은 일반 쓰레기통, 노란 뚜껑은 재활용 쓰레기통이며 초록색 뚜껑은 정원에서 나온 식물 쓰레기통이다. 집안의 모든 쓰레기는 부엌 뒷문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집 현관 문을 통해 들어오면 식구들의 손과 눈과 입으로 걸러져 나온 잔재는 쓰레기
봄이다.시드니의 봄은 자카란다 꽃으로 한층 풍성해진다.봄비가 오면 보라 빛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자카란다 낙화를 보면서 왠지 모를 아쉬움에 한숨도 짓는다.‘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져도 날 생각 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매창은 19세에 선비 유희경을 만났고 2년 후 이별하면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시조로 남겨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면 어김없이 '이화우' 싯귀를 떠올리게 한다.고국의 봄은 배꽃, 벚꽃, 살구꽃, 복숭아꽃으로 장식된다면 호주의 봄은 단연 자카란다(Jacaranda) 꽃이다
인생을 끝없는 여정이라고 한다.태어나며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해서 자식을 만난다.받은 대로 욕심 없이 여정을 보낼 수 있다면 다행이나 방황과 목표도 없이 불안 속을 헤매는 삶이라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정해진 방향 없이 편안했던 지난날이었다. 하지만 이젠 갈 곳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고 동행할 이도 옆에 있으니 그저 감사할 일이다. 길을 가다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 다시 일으켜주는 이, 기쁜 일은 같이 기뻐해주고슬픈 일은 서로 슬퍼해주며 위로해 주는 이와 늘 같이 한다면 그 어떠한 험한 길,외로운 길이라도 능히 이겨낼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쩌면 우리는 잘 길들여지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여건과 환경에 맞추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느덧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를 발견하고 놀란다. 처음 배더스트로 이사한 나의 느낌은 아들이 표현한 In the middle of nowhere 아무 연고지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상태였다. 그동안 익숙해진 여러 나라에서 ‘집’ 이라고 불렀던 그 많은 곳들과 지인들을 등 뒤로한 채 우리는 참 많이도 옮겨 다녔다. 아는 이도 없고 Bathurst 라는 지
오십의 중반이 넘어 간다고 생각하니 문득 내 나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나이가 되도록 해 놓은 것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돌아보니 그동안 지나치게 전투적으로 살아 온 것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대학을 가지 못했기에 남들처럼 사상에 물들어 데모를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주변으로부터 싸움을 잘한다는 평판을 얻은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토록 전투적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흑백논리에 대해 내 주장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그
타국에 도착하여 낯설은 것이 보이고 익숙하지 않는 냄새가 나면 우리는 대개 문화의 충격을 받는다. 포탄의 화약 냄새가 물씬 나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사이에 있는 이란의 테헤란 공항에 내려보니 건조한 모래 바람 속에 비릿한 양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이란 북쪽에 있는 카스피해 쪽에는 해발 4천 내지 5천 미터의 높은 산들이 많은데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등반을 하면서 많은 유목민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친절한 유목민들은 양 우유를 가지고 전통 방식으로 만든 치즈와 요구르트를 선뜻 내 주면서 산 중에서의 외로움을 이방인들을 통해 달래
나는 지금 맹그로브 나무 숲에 와있다. 나무는 햇빛과 불어오는 바람에 은빛으로 푸른 잎을 반짝이다 후두득 전신을 곧추 세운다. 바닷물에 잠겨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자란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일상 마음의 평정을 갖고 살려고 노력하나 본의 아니게 힘들 때가 생긴다. 그 사건들로 삶의 늪에 빠져들기도 한다. 심란한 마음으로 발길을 시드니 올림픽 공원으로 옮겼다. 고즈넉하던 평소와는 달리 주말이라 주차장엔 차들이 즐비하고 곳곳에 바베큐를 즐기는 군상들이 푸른 잔디 위를 울긋불긋 수 놓고 있다. 파라마타 강을 우로 끼고, 왼 편으로 넓은
가족: 혹시 임종이 가까워 왔을까?환자: 집에서 (의사가 없는) 갑자기 죽으면 어쩌나? 퇴원한 이튿날 결국 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급히 119를 불러 그동안 입원하고 있던 B지역 S대 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병원 응급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속을 척척 진행 시켰다. 강제퇴원 시킨 이유를 알고 보니 장기 환자에 대한 할인혜택 법령 때문에 병원수가가 병원운영 수지타산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환자가 응급실로 재입원 하면 초기 환자로 간주되어 각종 검사를 새로 하게 되고 병실을 재조정 받기 때문에 병원
집이 팔리는 문제로 여러 해를 속을 끓이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어 이사를 왔다. 내가 원하던 이층집이고 전체적으로 넓어서 좋았지만, 환경이 바뀐 탓인지 한동안 감기를 달고 지냈다. 소원하던 큰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떠나 온 집은 왜 자꾸 그리워지는지... 이민 와서 처음 장만한 그 집은 낡고 협소해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호사를 부릴 처지도 못되어 아쉬운 대로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며 28년을 살았다. 자식들과 함께 힘들었던 이민 생활을 견디며, 암, 수 두 마리의 치와와가 세 마리의 새끼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우리 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