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처음으로 혼자 나가는지라 들뜬 마음에 괜히 바빴다.
항공기가 아름다운 시드니 상공을 비행하면서 난 사진 찍기에 정신없었다.
정말 그림 같은 시드니!
기내 음식이 제공되고 나서 한국에서 보낼 일정을 계획하고 있는데, 옆 복도에서 두명의 승무원이 어느 할머니의 팔장을 끼고 뒤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의 안색이 매우 좋지않아 보였지만 승무원이 데려가니 별 신경쓰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계획표 짜는 일에 몰두했다.
한 5분쯤 지나 음악이 꺼지고 기내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혹시 의료인이 탑승했으면 승무원에게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조금 전 그 할머니가 생각났다.
내 좌석이 항공기 뒤쪽이라서 뒤돌아보니 커텐 사이로 할머니가 보였다.
의자에 똑바로 앉아계셨고 승무원이할머니 두 팔을 잡고 ‘할머니 괜찮으세요’하는 입모양이 보였다.
그때 손을 들고 나서고 싶었지만, 간호사 자격증이 허용되는지 여부 등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신입 간호사로서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도중이라 망설여진 것이다.
그러던 중 한번 더 방송이 흘러 나왔다.
뒤돌아보니 할머니 입술이 하얗게 변하고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승무원은 할머니의 팔을 흔들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고민하던걸 잊고 일단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불쑥 들었다.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고 말하기 무섭게 나를 급히 뒤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고 눈이 풀린 상태였다.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승무원은 할머니가 원래 고혈압이신데, 항공기 이륙 후 식사 전에 고혈압 약을 드셨다고 말했다.
일단 혈압 측정기를 달라고 부탁하고 할머니에게 다가가 정신을 놓으시지 못하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는 대답조차 못하시고, 힘까지 다 풀린 상태였고, 눈도 가물가물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일단 바닥에 눕히고 혈압을 측정해야 하는데 혈압계를 아직 안가져왔다.
살짝 놀래면서 빨리 가져달라고 부탁하자, 할머니 옆을 지키고 있던 최고참 승무원이 급히 지시해서 가져왔다.
혈압을 재어보니 80/45mmHg이었다.
할머니에게 원래 혈압을 물어 130/80mmHg 정도라는 답변을 어렵게 받아냈다.
쿠션을 가져와 할머니 허리 부분에 놓고 의자에 두 발을 올려 최대한 머리를 낮게 유지했다.
그리고는 산소탱크를 신속히 가져달라고 요청한 후 혈압 측정시 보았던 딱 달라붙는 내복을 벗게 했다.
그런데 아직 산소탱크가 안와서 다급하게 묻자, 최고참 승무원의 참았던 인내력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여승무원들이 승객을 접대하면서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난 입이 쫙 벌어졌다.
최고참 승무원이 목소리를 높여 “저기요. 모두 집중 좀 합시다.
그만 하고 누가 산소탱크 좀 갖다 주세요”하자, “네 ~ 선배님”하는 대답이 들렸다.
얼마 후 “선배님 여기요~” 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6명의 여승무원들이 6개의 산소탱크를 하나씩 들고 서 있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급하니 하나만 집어서 4L로 틀고, 마스크를 찼았다.
최고참 승무원이 나에게 “뭐 더 필요하신가요?”라고 묻길래, “산소탱크만 주시면 산소를 어떻게 공급하나요? 마스크가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마스크를 가져왔다.
할머니를 안정시킨 후, 당 수치를 모르니 낮은 것 보다는 조금 높은게 낫다고 판단해 오렌지 주스를 한컵 할머니에게 마시게 한 후 제자리로 돌아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멍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여승무원은 응급조치 등의 비상 대응 교육을 받지 않는지. 만약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 기내에서 갑작스럽게 아팠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도 하기 싫고 소름이 끼쳤다.
승무원이 내 좌석번호를 받아갔지만, 오늘까지 전화 한통 없다.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부담감을 안고 상황을 혼자 헤쳐나갔다.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얼마나 팀웍이 중요한지 깨달았다.
위급한 상황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 명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혼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느꼈다.
만약 다음에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보다 좋은 승무원들과 함께 상황을 극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간호사 김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