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한글 교육을 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와 방향을 갖는 것일까?많은 학부모들이 영어교육에는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한글 교육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슬쩍 흉내만 내는데 그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한글 교육은 단순한 언어교육 이상의 의미를 지닌, 자녀의 정체성 확립과 삶의 방향까지를 가늠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30여년 전 호주 이민 초창기 때만 해도 한글 교육을 시키는 학교나 교육기관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생계 유지가 고달픈 우리 부모님들은 한글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여유조차도 없었고 그 여파로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 단절 뿐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경험해야만 했다.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과 디지털 세대의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체험하며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제 한글은 떠나온 조국의 ‘모국어’라는 관념적 의미에서 벗어나, 호주와 한국을 잇는 현실적인 가교의 역할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과거 1세대 부모의 뼈 아픈 경험이 반면교사가 되어 누구나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가정에서도 가능한 한글을 쓰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2011년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한글 학교에 보내는 가장 큰 이유가 부모와 한글로 대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현실 속에서 이민자 부모로서 한글 교육에 전력하기란 쉽지가 않다.
대다수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기대감을 호주 주류 사회 속으로 진입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무엇보다 현지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주변인 이민자에서 호주 주류사회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이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미리 정해졌다.
초등학교 영재반(OC), 고등학교 셀렉티브스쿨(Selective Schools) 법대, 의대 진학. 한국 이민자 자녀 중 공부를 잘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쳐가는 엘리트 코스이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호주의 입시 경쟁 속에서 한국어 교육은 지금 계륵이 되어 버렸다.
한글 교육의 중요성은 충분히 알겠는데, 호주식 입시에만 매달리자니 시대착오적이고 자녀들과 대화가 안될까 걱정되고, 적극적으로 시키자니 시간 낭비에 경쟁에서 낙오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는, 작금의 부모들은 이 고민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한류의 바람으로 부모세대를 떠나 아이들이 먼저 한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한글 교육을 받는 것은 단순한 언어 습득 이상의 커다란 의미가 있다.
만약 정기적인 한글 교육이 호주 교육 시스템을 따라가는 데에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 방안도 있을 것이다.
비교적 입시 부담이 덜한 어렸을 때 집중적으로 한글 교육을 시작했다가, 학교 입시나 시험 기간엔 호주 교육에 집중하고 다시 여유가 생기면 한글 공부를 지속시키는 타협안이다.
물론 서로 다른 극단의 지점에서 타협안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당장 직면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고민은 있기 마련이다.
한글 교육을 통해 부모와 자녀간에 반쪽 대화가 아닌, 깊고 진실된 대화가 가능하며, 자신의 뿌리와 자아를 찾아 보다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해가는 정체성이 확립된다면, 이보다 더 의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민자로서 호주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한번쯤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피상적으로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직업인으로서의 성공적 삶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항상 건강하고 어느 분야에서든지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늘 기쁘께 살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이제 호주에서의 한글 교육은 단순한 가족대화의 목적을 떠나 자녀 스스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믿음이 근간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위해서는 부모 세대 스스로 한글 공부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대충 때우는 들러리가 아닌,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위한 집중적인 투자로 이루어진다는, 제3의 자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임영웅(버큼힐성당 한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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