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린 한국사람 아니에요. 근데 왜 한국말 배워요? 재미없어요.”우리 고급반 아이들이 툭하면 무심코 내뱉는 말이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수업이 하고 싶지 않을때, 조금이라도 지루하다 싶으면 던져 버리는 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충격이 컸던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들으면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호주에서 태어났거나 아주 어릴적에 호주로 이민을 온 우리반 아이들… 호주의 삶과 교육과 문화, 정서가 그 아이들의 것이고 말 그대로 한국인이 아니라 호주인임이 사실인데도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왜일까?그래도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글학교에 출석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어김없이 토요일 아침이면 힘없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스마트 폰으로 손이 가는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진다.
‘이 녀석들… 그래도 오늘도 왔구나…’ 우리 고급반 아이들은 한글로 말하기, 읽기, 쓰기가 비교적 자연스러운 아이들이다.
읽고 쓰고 말하기가 가능한 이미 머리와 몸이 훌쩍 커버린 아이들…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한글수업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키며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늘 고민일 수밖에 없다.
한글학교 수업준비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은 어느 날이었다.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남편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호주 이민 1.5세대인 남편은 한국말을 잘 구사하기는 하나 어휘력이 약해서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방송을 시청하면 늘 질문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날은 단어의 뜻이 아닌 역사에 관해서 묻는 것이었다.
무슨 드라마를 보길래 그러나 봤더니 바로 ‘각시탈’ 이라는 드라마였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인터넷 기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쓰여진 드라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을 저런 식으로 고문했어?” “진짜로 드라마처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남편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 가던 나는 한글학교 아이들이 떠올랐다.
남편도 모르는 역사적 사실들을 우리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아니 궁금하기는 할까? 달력을 보니 광복절이 다가 오고 있었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한국은 여러가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인 문제로 일본과 팽팽한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사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기로 하고 수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업 당일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전 경기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바로 한일전이었고 아이들은 한국이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을 따서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냥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한단다.
다른 나라한테 지는 것은 괜찮은데 일본한테는 지면 안된단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일본이니깐 일본이 싫단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우린 한국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해도 너희도 어쩔수 없는 한국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연스럽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 강점기와 독립운동 그리고 광복에 대해 알려줄 수 있었다.
'한국 아이돌이 부르는 가요와 아이돌이 출연하는 드라마가 한국에 대한 유일한 관심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 아이들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까?' 하는 걱정을 왜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들이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 날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본이 얼마나 잔인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을 듣고 아이들이 더 일본을 싫어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 일본은 옛날의 그 잔인한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의 나라 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국제적으로 소소한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역사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 교육에서도 역사를 ‘선택제’로 배우게 하는 이 시대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호주 친구들 중에 누군가가 독도에 대한 기사를 보고 물어왔을 때 당당하게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잡아주는 사람이 우리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열풍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는 요즘 누군가가 한국에 대해 물어왔을 때 누구보다 자신있게 알려주는 사람이 우리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어느 누구보다 더 훌륭한 한국어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한글학교에서 단순히 한글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통해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인이 되어갔으면 좋겠다.
“호주에서 호주 시민권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너흰 한국인이란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한글학교에서 배워갈거라 믿는다.
최진영(시드니 중앙교회 한글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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