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10시간 달려 Grafton에 왔다.
그라프톤에서는 매년 10월말 2주 동안 Jacaranda Festival이 열린다.
올해로 78번째인 페스티발의 끄트머리에 동참했다.
산장 같은 아담한 호텔주변을 잠깐 둘러보며 첫날을 보냈다.
자카란다 페스티발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 아침, 그라프톤이 자랑하는 자카란다 거리를 걸었다.
바닥도 하늘도 온통 보라 세상이다.
2차선 자동차 전용도로 양 옆으로 자카란다 나무가 도열되어 있다.
폭이 자동차 도로보다 배나 더 넓어 보인다.
자카란다 나무 사이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 같은 외지인을 위한 쉼터이다.
그 벤치도 보라색이다.
보라, 보라, 보라 천국이다.
해마다 열리는 자카란다 축제는 인구 이만 삼천의 이 조그마한 도시에 최대 행사이다.
이 도시엔 신호등도 없고 경찰차도 안 보인다.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가는 남녀 경찰 한 쌍이 보인다.
원주민 남자가 바닥에 깔린 보라 꽃잎을 한 아름 가슴에 담아 달아나는 아내의 머리에 쏟아 붓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아~ 나도 한번 해 볼 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리를 오가는 여자들은 대부분 보라색 모자를 쓰고 다닌다.
보라 천국에 머물다 보니 벌써 한낮이 되었다.
점심은 마을의 중심인 시계탑 밑에서 해결했다.
오후엔 각종 행사가 이곳, 저곳에서 벌어진다.
치마복장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의 파이프 밴드 행진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제일 앞에 3명의 기수가 당당하게 행진을 인도한다.
그 중, 한명은 다운 증후군 청년이다.
입을 헤벌리고 어설픈 웃음을 머금고 행진하지만 밴드 부대는 힘차게 움직인다.
해질 무렵이 되니 행진으로 이번 행사가 마무리 되는듯하다.
그라프톤 전역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한 듯, 없는 것 없이 모두 제각각의 치장으로 시내행진을 한다.
100년이 넘었다는 골동품 명차를 선두로 트럭, 전차 같은 크레인, 고물 버스, 마차까지, 모든 이동수단이 지나가고 각 학교 아이들이 갖가지 분장을 하고 행진한다.
그 옛날 우리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는 듯하다.
회사 선전 팀도 지나가고 심지어 유니폼 입은 복덕방 직원들 행진도 이어진다.
행진 구경 인파를 벗어나 조용한 강가로 발길을 옮겼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공원에 다달았다.
아름답고 조그마한 공원에 바람이 솔솔 불어 페스티발 끝자락의 자카란다 보라 꽃잎이 내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공원 중앙에서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탑을 만났다.
아니, 한국전에서…… 탑에 각인된 이름을 하나, 하나 손으로 읽었다.
17명이다.
KELLY C.B KENNEDY O. MACLUCAS U.R.P MACLUCAS C.G.E MARMON C.C.E NOUD C.J PENN J. H PHEMISTER P.E.H PRISTLY V. PULLEN W.T RHYNHART E.W SIDNEY E.C THORNTHWAITE J.C TONKIN W.H VAUGHAN A.C VERSO C.L WARNER W.E LEST WE FORGET KOREA 1950-53 이 아름다운 보라의 세상에서 살았던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이 멀고먼 이국땅 코리아에서 전사했다니……. 호주는 한국의 6·25 전쟁 때에 1700여명이 참전하여 339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339명중, 시골 촌구석인 이곳 그라프톤에서 17명이 전사했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사했을까? 호주군의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가평전투인가? 코리아의 어느 전선에서 마지막을 맞이했을 그 17명의 청년들, 그들은 입대 전까지 살았던 천국 같은 그라프톤의 보라색 세상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얼마나 그리웠을까 자카란다 꽃잎이, 사무치는 그리움에보라 속으로, 보라 속으로,보라 천국으로 입성했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우리 고국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도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이들이 전사하던 때 태어난 내가 오늘, 여기에 서있다.
장석재(수필가)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