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완벽함이 아닌 진정성으로부터 오는 것”“제 자아와 욕심과 승부욕을 다 던져 버려야 해요…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까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어요.”국립국악원에 춘향전을 보러 갔는데, 춘향이 역을 맡은 배우가 금발머리에 파란 눈이고, 이 도령 역에는 곱슬머리에 흑인이 갓을 쓰고 있다면 한국인들은 어떻게 느낄까? 판소리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을까? 이런 이례적인 캐스팅에 대한 의구심을 한 번에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 역을 맡은 외국인 배우들이 한국인 소리꾼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 생겨나 유럽인이 배역을 맡아야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오페라에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당당히 주연을 맡는다면 어떨까? 실력이 월등하지 않고서는 얼른 보기에도 어색한 동양인을 오페라 무대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비엔나 극장의 경우 한국인 가수가 무대에 많이 오르자 시민들이 “왜 아시안들이 많이 올라오느냐”며 투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운 오페라 주역을 도맡아 하며 세계 오페라계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당당히 알리며 한국인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테너 이용훈 씨를 시드니의 오페라 제작사인 오페라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만나 봤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에서 지난 6일부터 시작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서 남자 주인공인 ‘카바라도씨’역을 맡아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번 ‘토스카’는 오페라하우스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작품으로 이른바 ‘뉴 프로덕션’이다.
어떤 오페라든 새롭게 제작하는 뉴 프로덕션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가장 확실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상례이다.
오페라 가수들은 뉴 프로덕션 작품을 몇 개 했는지가 굉장한 커리어가 된다고 한다.
이 씨는 동양인임에도 이런 뉴 프로덕션 작품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가수이다.
“처음 유럽 데뷔를 뉴 프로덕션으로 했어요. 그래서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됐죠. 한 번 뉴 프로덕션에서 성공했기에 그 뒤에도 러브콜이 많이 왔어요. 하지만 주목을 많이 받는 만큼 리스크도 크죠. 공연을 망칠 경우 그만큼 더 급속히 알려지거든요.”이처럼 부담이 많은 뉴 프로덕션 작품이기에 긴장도 많이 하지만 이 씨는 오히려 공연을 ‘리허설’처럼 자연스럽게 하려 노력한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하면 순간순간을 놓치게 돼요. 그냥 하나님이 제게 허락해 주신 많은 순간들을 다 누리고, 감사하고 즐기고 싶어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그 마음이 절 구속하거든요.”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자신이 노래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여러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매년 8월에는 스케줄을 잡지 않고 선교활동에 자신의 재능을 쓰고 있다.
8월 선교활동을 두고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제게는 그 시간(8월)이 십일조이고, 영과 몸이 휴식하는 기간이에요.”한창 커리어 하이에 올라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가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아테네에서 토스카 공연 중 성대가 갑자기 파열되는 치명타를 입은 것. 성대 부상 후 자신이 노래해야 할 남은 부분은 오케스트라 연주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 가수로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이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데뷔하고 1년도 안 돼서 레코드 회사에서 연락이 오고, 유명한 무대에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고… 커리어가 수직상승했던 때였죠. ‘겸손해야지…’하는데도 마음이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소리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그 후 그는 목소리를 잃었다.
권위 있는 의사가 수술을 해야 노래할 수 있다고 권유했지만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기도를 통해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수술 후 5개월이란 재활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했는데 사고 2개월 만에 ‘돈 카를로스’ 무대에 오르는 등 빠르게 회복됐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소리가 더 좋아졌다고 전했다.
전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이지만 정작 한국에선 한 번도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오해가 많다며 자신의 입장을 꼭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외국에서는 한 4-5년 전에 미리 스케줄을 잡아서 캐스팅 제의를 해요. 그런데 한국에선 빨라야 1년 전에 연락이 옵니다.
이미 잡혀 있는 일정을 취소할 수도 없고 난감하죠. 한 번 공연을 하려면 한 장소에 1-3개월 머물기 때문에 스케줄에 빈틈이 없어요. 잠깐 들어와서 노래만 하고 다시 가면 안 되느냐고 하시는 분도 계신데, 저로선 그게 용납이 안 돼요. 그 어떤 무대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오페라 가수로서 제 의무이니까요. 물론 한국의 오페라 제작 여건상 1년 전에 연락 오는 것도 대단히 배려를 많이 한 거예요. 그분들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자신도 고국 무대에 꼭 오르고 싶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국 공연을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고 전했다.
그는 성공의 기준은 ‘완벽함’이 아니라 ‘진정성’이라고 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보여주는 데서 감동이 전해진다고 강조했다.
“오페라 가수는 영화배우처럼 잘 못했다고 해서 끊고 갈 수가 없잖아요. 실수한 후에 ‘내가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박혀 있으면 공연이 전체적으로 말리게 되죠.”“제 자아와 욕심과 승부욕을 다 던져 버려야 해요. 승부욕이 강해야 성공한다고들 하는데, 제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승부욕이 아닌 것 같아요.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까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어요.”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완벽함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는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시대에는 진정한 미를 완벽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감동을 받는 것은 ‘진정성’에 있어요. 기능적으로만 잘하면 ‘와 잘한다’라는 느낌을 받지만 금방 잊혀지죠. 음악은 진실된 것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진정성이 결여된 예술은 부족한 거라 생각해요.”오페라 연기에서도 그는 과장된 제스처보다는 진정성 있는 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요즘은 몸짓을 너무 크게 하면서 노래하면 오히려 어색해요. 리얼리티가 중요시되는 시대라서 내면연기도 해야 하고, 실제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표현해야 하죠. 그래서 연기자가 작품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 성악가들의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이 씨는 이처럼 왕성한 활약을 펼치는 한국 성악가들이 많은데도 국내의 관심이 많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국인들은 오페라뿐만 아니라 음악계 전반에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유명한 극장에 가 봐도 이런 음악인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거의 없는 실정이에요. 제가 섭섭한 게 아니라 차세대를 생각하면 참 안타깝죠. 김연아 씨에 감동받아 또 다른 차세대 스타가 나오고, 2002년 월드컵 4강을 보고 많은 차세대 축구 스타들이 세계로 진출하잖아요. 음악계에서도 이런 선순환이 이뤄져야 할 텐데…”동양인이라는 핸디캡에도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겨뤄 실력으로 인정받은 그이지만 인터뷰 내내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번 공연에 시드니 한인들이 많이 와 주길 바랐다.
“이렇게 귀한 시드니 땅에 초청받아 한인 교민 여러분을 뵙게 돼 너무 영광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오페라 문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페라하우스에서도 사활을 건 작품이어서 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인터넷에서 줄거리를 찾아 한 번만 읽고 오셔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습니다.
앞으로 많이 성원해 주시면 시드니에도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서기운 기자freedom@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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