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득 변호사(좌측)와 한종석씨
다음은 김경득 사건이다. 1949년 생인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인임을 숨기고 일본인으로 살아왔다. 1972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김경득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관례대로 2년간 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고등재판소는 김경득에게 합격통지서와 함께 귀화수속 서류를 보내왔다. 이 일이 그의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는 본명 김경득을 되찾았다. 김경득은 재일한인을 위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 컸다. 그는 최고재판소와 일본인 변호사협회에 한국 국적으로 변호사가 되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일본인 변호사협회는 ‘김경득 지지모임’을 구성해 그를 지원했다. 이에 고등재판소는 ‘사법수습생 패용 선고요령’을 발표했다. 김경득은 한국인 국적을 갖게 되고 변호사가 되었다.
 
김경득 변호사의 한인 권익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재일동포사회에 큰 힘이 되었다. 박종석 사건 이후 이인하 목사가 주도 하는 운동은 세금투쟁을 하고 이동수당, 공영 주택입주 권 등을 요구했다. 최근에는 민단이 적극적으로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다. 김경득은 지문날인 거부운동과 일제 강점 하 일본군 위안부 소송을 비롯한 전후 보상 소송을 이끌며 재일교포 인권운동의 구심점에 섰다. 김변호사는 지난 해 12월28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고인은 유고에서 "전후 60년에 걸쳐 일본사회에 살아왔고 교포 5세의 탄생을 맞은 재일 한국인은 일본과 한국, 북한 사이의 민족적 대립감정을 완화하고 서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있어 중요한 가교적 역할을 해온 존재"라며 "일본 국회는 하루 빨리 외국인 지방참정권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1980년 도쿄 신주쿠 구청에 출두한 한종석은 갱신하는 외국인 등록증 지문 날인을 거부했다. 한일조약에도 위반 되는 행위였다. 한종석은 구금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인, 독일인 등의 호응을 얻고 재일동포 3세들의 적극적 지지를 얻는다. 지문날인 거부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고 1만 명 이상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구금 된다. 한종석의 손가락 하나의 거부가 전국으로 전파 되어 점점 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에 한국정부가 나서 1991년 항일협정체결 25주년 기념으로 이 지문 날인을 없애 버린다. 
 
경상북도 출신인 한씨는 1980년 재일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문날인을 거부한 뒤 일본 전역을 돌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일본 정부는 55년 외국인을 관리할 목적으로 강제지문날인 제도를 도입했으며, 거부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인등록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첫 인물이기도 한 한씨는 89년 히로히토(裕仁) 일 왕 사망에 따른 대법원 면소판결을 받았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1980년 9월 10일 지문날인의 제1호 거부자인 한종석이 1983년 제1회 공판을 받으면서 이 두 조직은 연대투쟁을 했다. 1989년 7월 14일 최고재판소는 2심에서의 유죄판결을 파기하고 면소 판결을 내렸다. 한종석 사건의 발발로 1984년 3월 '한씨 일가의 지문날인 거부를 지지하는 모임'에서 [검지손가락의 자유]라는 책을 출판하면서부터 법 개정을 위한 연대투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1983년 10월 1일 외국인 등록법 개정을 위해 궐기한 재일한국청년회는 국토종단을 하면서 10만 5,535명의 서명을 받았고, 재일동포 2,?3세대인 젊은이들 역시 지문날인 거부결의를 강화했다. 이에 일본은 1984년 공명당과 공산당의 '지문날인 완전폐지'를 촉구하는 등 법 개정의 가능성을 보이다가 1988년 6월 1일 지문전사(指紋轉寫)를 행한다는 신 외국인 등록법이 시행되었다.
 
한씨의 활동으로 일본 전역에서 1만 명 이상의 재일한국인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일본 법원이 ‘외국인에 대한 강제 지문날인은 인권침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2000년 이 제도는 폐지됐다. 재일한국인 지문날인 거부자 1호로 반대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한종석(사진)씨가 25일 새벽 도쿄의 한 병원에서 79세로 별세했다.
 
사회를 바꾸는 큰 사건도 그 발단은 미미한 곳에서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모임이 시작 됐다. 가와사키 시의 ‘당나귀 어린이 회’ 아마가사키 시의 ‘토끼 어린이 회’ 그리고 야오 시의 ‘도깨비 어린이 회’ 등이 그 것이다. 이들은 부근에 거주하는 한인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의 숙제를 돌봐주고 한국역사, 한국어, 한국노래 등을 가르쳤다. 방학 동안에는 한국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한국에 대해 계속 배우던 이곳 학생들이 어느 날 ‘본명선언’을 한 것이다.
 
제일 동포들은 한인이란 것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통명을 갖고 있다. 이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특히 통명을 사용한다. 이 사건은 어린 학생들이 조센징(한국인)이기 때문에 평생 놀림을 받고 ‘이지매(왕따)’가 되어도 한국인으로 떳떳이 살겠다는 의식의 혁명이었다. 차별과 편견에 맞서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민축제의 하나로 ‘거리축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말로 성장한 젊은이들이 한국인임을 떳떳하게 표시하며 거리를 행진한다는 것은 1~2세들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오사카 이구노쿠에서는 한복을 입고 한국악기를 울리며 시가행진 하는 한국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곳에 있는 한국 시장에는 ‘코리아타운’이라는 현판을 높이 달았다. 
 
요즘은 통일은 기원하는 ‘원코리아’ 페스티발이 오사카의 정갑수에 의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이 행사가 처음에는 남, 북한 양쪽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지금은 한국 문화, 예술 공연이 여러 군데에서 열리고 있으며 남북 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월드컵 경기 중에는 일본 도시 거리 곳곳에 한국응원단 모임이 있었다. 의외로 많은 일본인이 호응을 해왔다. 재일동포들은 물질적으로도 과거 새마을운동에 보내 온 많은 성금 외에 “88 올림픽” 때는 100억 엔의 성금을 보내왔다. 그들은 지금도 모국에 미국동포 다음에 많은 송금을 하고 있다.
 
제일동포사회는 4.19, 5.16 때 한국 민주화 운동을 벌였고 ‘김지하 지키기 모임’을 가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재일동포 지식인, 청년들은 후원회를 조직해서 김대중을 도왔다. 재일 동포는 오히려 재중 동포보다 남북한 관계개선에 있어서는 더 적극적이다.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는 국제회의도 자주 열었고 북한을 일깨워 주는 작업에 항상 앞장 서고 있다.
 
한반도와 연변, 연해주를 연결하는 한민족 경제공동체에도 제일동포들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연변과 연해주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앞서고 있다. 두만강 삼각지대 개발에 재일동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한상대(前 시드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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