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기독교문명시대. 거창하게 들리지만 현재 호주를 포함한 서구사회의 현실을 설명하는 단어다. 일단 서구사회는 적어도 우리같은 비 서구인입장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나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사회’다. 여기에는 일반적을 동의하는 것처럼, 윤리관과 인권의식 같은 분야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논란은 있지만 법 논리, 경제관, 과학에 관한 관점 같은 분야에서도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많이 발견되는 사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서구를 기독교 문명이라고 불리고, 서구사회와 회교권의 갈등을 기독교와 무슬림 문명의 갈등이라고 표현한다.
 
문제는 서구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 만큼 더 이상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 말은 교회건물이 레스토랑이나 장례식장으로 팔리는 현실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런 재산권 변동은 교회가 보다 필요한 곳에 자원을 쓰기 위한 정책적인 결정일 때도 많다. 실제로 문제는 서구사뢰를 지배하는 가치관이나 문화가 더 이상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거부하는 식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동성애결혼 합법화 문제가 좋은 예다. 정부가 인정하고 지원하는 ‘가정’의 합법적 단위에 동성애관계를 포함시키자는 제안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대세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따지기 앞서, 우리네 가치관은 이제 진리보다는 대세와 편리에 지배를 받고 있다. 이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경쟁을 최선의 가치로 삼고, 약자보호에 관심을 잃어가는 우리네 경제구조도 ‘반 기독교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경쟁의 미덕은 ‘다윈주의’의 가치이고, 양육강식과 경제논리는 철저하게 물질우선사고방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서구사회는 껍데기로는 교회의 영향은 상당하고, 구석구석에서 갱신운동도 없지 않다. 도리어 보수대형교회들을 기반으로 한 단체들이 서구안에서 ‘기독교문명의 사수’를 외치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통령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전쟁을 벌이고, 보수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정치에 까지 참여하는 현재 상황을 보면, 여전히 서구사회는 ‘매우 기독교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윤리체계조차 이제는 은혜중심의 기독교가치에서 율법적인 기독교-유대교적 가치로 돌아선지 오래고, 가장 기독교적인 사회정의나 인권의식 같은 것도 철저한 돈의 논리로 쉽게 무시된지 오래다. 도리어 현재 사회정의나 인권에 관한 싸움이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반기독교적이기까지 한 좌파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쨋든 지금 교회는 탈 기독교문명사회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교회출석자가 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사회전체가 교회나 신앙을 거부하고 반발하는 시대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기독교세계관운동이나 공공신학운동이 말하는 것처럼, 다시 기독교적 가치를 교회외 영역, 공적 영역에서도 드러낼 활동을 벌이는 것이 답일까?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과 신앙이 더 이상 그렇게 조화롭지 못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권세가 하나님을 적대하고 있다는 현실, 그러기에 세상적인 성공이나 성과가 더 이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준이 되기 힘들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종종 우리에게 이 두가지가 교집합을 이루도록 하시는 ‘배려’가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신앙인 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반항아’, ‘역류’를 의미한다는 점을 바로 봐야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긴장감을 가지고,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의 기초를 바로 다지지 않고서는 다른 대안을 만들 여력이 나올 곳은 없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이것을 ‘종말론’으로 표현했지만, 이들의 종말론은 주로 ‘세상의 마지막’에 강조를 두었다. 우리의 종말론은 세상의 마지막보다는, 이 시대와 올 시대의 긴장과 갈등을 직시하는 눈이다. 이 갈등을 각오하며 살아가는 신앙이 더 간절한 시대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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