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회예배에 가면 사도신경을 하는 곳이 하지 않는 곳보다 많다. 필자는 침례교 출신이기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아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초대교회의 원형회복'에 남다른 집념이 있는(!) 침례교회들은 신약성경시대 이후에 더해진 신앙고백류들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개혁주의적 설교로 유명한 존 파이퍼가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사도신경을 배척하고 보다 더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 것을 보고 일갈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지도자들은 사도신경을 거부함으로서 교회가 오랜기간을 통해 혼란과 이단의 공격에서 사수한 복음의 본질을 도리어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도신경은 성경 자체가 말할려는 내용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는 역할, 더 나가서 성경을 왜곡하려는 일부의 노력을 막기위한 '꼭 필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는 교회사를 통해 나왔던 건강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들은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되는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을 무시하다가 그 당시에 성도들이 빠졌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기 쉽상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영적 겸손이자, 기독교가 그동안 거친 경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경고로 들린다.
 
실제로 성경 자체는 방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흐름을 잡고, 핵심을 읽어내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때문에 '성경으로만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그리 '명확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단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이해하는 바른 기준의 필요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중요성은 그런 '거르기 수준'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사도신경은 교회가 동방정교, 카톨릭, 이후 개신교와 다양한 교파로 갈라지기 이전에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인 '공통 신앙고백'이다. 이점에서 우리가 많이 서로 강조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믿음의 형제자매로 인정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점에서 사도신경은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을 하는 쪽에서 매우 중요한 연합의 도구로 이해된다.
 
우리가 역사적 신경들을 없는 듯 대하고, 사도신경마저 홀대하는 사이에, 어쩌면 성경에 대한 읽는 기준도 같이 흐려지고,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이어주는 영적 연대감도 사라지고 있는 지 모른다. 이 속에서 성경은 갑자기 특정 개인이 주관적으로 받은 영감으로 무자비하게 난도질되고, 기독교의 교파들은 마치 다른 종교처럼 서로를 대하며 서로에게서 배워야 할 것에 귀를 닫을 때가 많다.
 
가끔이라도 우리네 예배에서 사도신경이 같이 고백되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교회마다 교단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집에 관심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현대교회의 현실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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