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샘물이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지만 정은 옛정이 정말 좋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인생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돌아가지요. 조금은 이른 감이 들지만 이제 당신과 나는 돌아갈 곳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 시기 같습니다.
 
문명이 발달되어 인터넷으로, 이메일로, 팩스로...세계가 일일권에 있다지만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사랑은 왜 메말라만 가는지요. 사람들의 몸짓에서, 눈빛에서 찬바람을 느낍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친구를 만나도 길을 걸어도 텅 빈 마음의 공간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그리워서 당신의 따뜻한 마음벽에 기대고 싶어서 당신을 만나기 위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일 중독자처럼 일만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며 쉼의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만날 날을 고대합니다.’
 
윗글은 내 친구 유림이가 보내온 편지의 일부분이다. 유림이와 나는 인연의 끈이 아주 길다. 오래전에 와이즈맨 클럽을 통해 만났다. 유난히 성격이 쾌활하고 바른말도 잘했고, 사람의 마음을 잘 매만져주고, 매사에 앞장서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유림이의 남편은 공업고등학교 교장이었다. 가족과도 친하게 지내며 가정사 모든 일에 함께 했다. 1986년으로 기억된다. 세계 와이즈맨대회가 일본 나고야에서 열렸는데 그곳에 한국 지역대표로 유림이와 내가 동행을 하게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참석한 대표들과 교제의 시간을 가지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깨달았던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6박 7일의 일정을 마치고 그녀와 나는 일본에 일주일을 더 머물며 여러 곳을 방문하며 관광을 했다. 나는 유치원에 관심이 있어 유치원을, 유림이는 양로원에 관심이 있어서 두 곳을 모두 같이 방문하기로 했다.
 
유치원을 방문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시설 규모는 한국보다 작지만 내실이 든든히 서있고 교육내용도 한국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양로원을 방문했다. 거의 모든 노인들이 80세에서 100세가 넘은 고령자이신데 비해 건강했으며 시설 내부도 노인들이 생활하기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 눈에 특이하게 보인 점은 노인들 방문 앞에 독사진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노인들이라 밤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 한답니다. 그래서 노인들의 독사진을 아침에는 얼굴을 보이게 걸어놓고, 저녁 해가 지면 사진을 돌려놓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노인들의 방 앞을 지나다니며 점검을 해보면 사진이 그대로 돌려진 채 그대로 있는 곳이 있지요. 그 방은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밤새 아팠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이미 일본은 고령화 시대를 걱정하고 있었다. 땅은 작고 인구는 많으니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뼛가루를 항아리에 담아 묘소에 안치해 놓거나 땅에 묻는다고 하였다. 일본 인구의 85%가 노인이라고 하면서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거듭 이야기 하였다. 노인문제가 어찌 일본뿐이랴. 이제는 한국도 장수시대가 오면서 노년의 삶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자식이 많을수록 서로 부모 모시기를 미루는데 줄다리기하듯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노인이 서 있을 곳이 없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점은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독거노인으로 살아가는데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새벽에 상가 골목길을 헤매며 폐지 줍는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늙기는 바람결 같다고 했던가. 나 또한 자식 키우고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손자 돌보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보니 내 젊음은 어느새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영락없이 쓸쓸한 노인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앞만 보고 열심히 뛰고 또 뛰었는데 남은 것은 병이요, 가난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주어진 삶은 언제 어느 때나 남의 것이 아니고 내 몫이다. 지난날을 뒤 돌아보니 내가 틀을 잘못 짜 놓았고, 생각이 짧았다. 
 
노년을 철저히 준비해 놓지 못 하였다. 젊어서 힘 있고 일 할 수 있을 때 노년을 위한 저축을 더 많이 해 놓았어야 했다. 자식들을 일찍부터 내 곁에서 떼어놓기 연습을 못한 것이다. 평생 자식 곁에서 사는 것이 숙명 인줄 알았고 행복인 줄 알았다. 성경에도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 할지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이다. 
잘 준비하면 노년은 결코 슬픈 계절이 아니다. 여유로움이요, 삶을 관찰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유림이가 오면 다시 함께 호주의 이곳저곳을 관광하면서 노년에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탐구하고 유용한 곳도 방문해 볼 작정이다. 더 늦기 전에 두 손을 잡고 노래도 부르며 마음껏 우정을 나누리라. 
 
이명주(글무늬 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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