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시작할 때, 여동생이 입대 백일을 기념한다며 ‘독서신문’을 소포로 보내왔다. 일 년간의 정기구독을 했음인지 커다란 바인더까지 배달되었다. 답장하는 마음으로 독서신문사에 나의 소감을 보냈더니 다음 호에 실렸다. 그 후, 많은 위문편지가 쏟아졌다. 대부분 고등학교 여학생들이었다. 갑자기 고참병들이 잘해 주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미쳐 처리할 수 없는 주소들을 하나씩 넘겨주었다. 그리곤 내가 좋아하는 편지들만 답장하다가 결국, 제대하는 날까지 남은 딱 한 명의 이름이 ‘영주’이다. 그 여학생의 오빠도 군 복무 중 인데 친 오빠한테는 일 년에 딱 한번 보내지만 나에게는 매주 한 통 이상 보냈다는 영주. 얼굴은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만난다면 금방 알아 볼 것만 같다.
 
최전방에서 첫 휴가를 받아 부대에서 군 트럭으로 문산 도착, 서울행 시외버스를 탔다. 버스가 만원이었으므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 앞에 서있던 예쁘장한 처녀가 슬쩍 슬쩍 나를 보며 웃는다. 나의 얼굴이 불거졌다. 서울 오는 내내 그 처녀는 아무 말도 없으면서 연실 쳐다보곤 웃는다. 홍제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내릴 때에도 나를 보며 웃는다. 나는 그 예쁜 얼굴에서 눈을 못 떼고, 얼떨결에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순간적으로 뒤따라 내리던 사람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한 마음으로 뒤를 보며 눈인사를 했다. 복장을 보니 우리 부대 병사이다. 명찰을 보니 ‘임신중’ 계급은 병장. 덩치가 엄청 크다. 그 처녀가 또 웃으며 쳐다본다. 정신 차리고 가만히 보니 그녀는 내가 아닌, 육군 병장 임신중 명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야간 철책선 경계 근무를 마치고 달게 자고 있는 시간에 신병 한명이 상황실로 나를 찾아왔다. 이유는 방책선 근무가 너무 힘들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둔 아버지였으며 나이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고탁석 이병’이었다. 입대를 미루고 미루다 할 수 없이 입대한 것이었다. 자유롭게 농사짓고 살아온 그에게 밤을 꼬박 새우는 GOP (General Out Post : 일반전방초소)의 철책선 경계 근무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작전 서기병인 나로서는 방책선 근무 부적격자로 분류하여 상급 부대로 전출 의뢰서를 보내는 일과 자체적으론 취사병으로 전보 시키는 일뿐이었다. 나의 설명을 들은 그는 취사병 근무를 간절히 원했다. 얼마 후, 취사병 한명이 만기 제대하여 그가 취사병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 식사 때가 되면 고탁석 취사병으로부터 ‘일찍 오세요’와 ‘늦게 오세요’라는 두 내용이 번갈아 온다. 일찍 오라는 날은 돼지고기 국이 나오는 날이고, 늦게 오라는 날은 쇠고기 국이 나오는 날이다. 돼지고기는 둥둥 뜨고, 쇠고기는 밑에 가라앉는 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는 날은 고기 국이 없는 날이다.
 
나의 군 생활은 GOP 부대에서 ‘발전사병’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는 방책선 전원이 발전기를 통하여 공급되었는데, 6 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한전에서 전력을 공급하기 시작하여 나는 발전사병에서 중대 본부 작전서기 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첫 휴가를 다녀온 후 얼마가 지났을 때, 마지막 발전사병으로 사고 없이 잘 마쳤다고 일주일간의 포상휴가가 주어졌다. 첫 휴가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반가워하며 좋아했었으나 그 보름간의 휴가 때에 너무도 삶에 지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었다.
 
포상휴가를 받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무심코 종로로 갔다. 종로 명소인 종로서적에 들러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 종로 3 가 쪽으로 쭉 내려가니 여기저기 상패 전문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곳에 들어가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가장 싼값의 조그마한 상패하나를 골랐다. ‘장한 어머니상’ 일단 제목을 정하고 여러 가지 견본 중에 한 가지를 골라 상패를 만들었다. 그런데 누구의 이름으로 상패를 만들까 잠시 망설였다.
 
‘제1사단 사단장 준장 박학선’으로 할까, 아니면 
‘제11연대 연대장 대령 류준형’으로 할까……
사단장 이름으로 하면 한결 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얼굴은 본적 있지만 악수 한번 해보지 못했고, 연대장은 방책선 경계근무 순시 중, 야전 발전소에서 발전기를 가동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수고 많이 한다며 악수까지 했었으니 혹시나 나중에 발각되더라도 악수해본 연대장은 봐줄 것만 같았다. 
나는‘제1사단 제11연대 연대장 대령 류준형’의 이름으로 상패를 만들었다.
 
<귀하는 일병 장석재(12256204)의 어머니로서 ……>  
 
포상휴가로 나온 큰 아들로부터 상패를 전달 받은 어머니는 군번까지 또박 또박  읽고 또 읽어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부터 씩씩해 졌다. 
 
“이래 봐도,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장한 어머니 상을 받은 사람이야!”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그 자부심으로 살아오셨을 것이다. 
바깥출입도 힘들고 정신도 오락가락 하는 구십의 어머니는 아직도 그 상패를 기억하고 있는지 가끔, “이래 봐도…… 나는…… ”하며 목소리가 씩씩해지곤 한다.
 
최영주, 임신중, 고탁석 그리고 류준형 대령님! 한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불현듯 생각나는 그리운 이름들이다.
 
장석재 (2012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 대상 수상 / 현재 <수필 동인 캥거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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