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뚝에 차기 위해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완장의 무게는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볍다. 그러나 완장은 언제나 묵직하다.
 
막내 아들은 8살부터 토요일마다 놀며, 시합하는 동네 축구를 했다. 동네 리그에서도 가장 하위급인 레벨 4팀이다. 12살이 되던 해, 축구를 잘하던 5명이 레벨 3팀으로 옮겨감으로 인해 막내 팀은 선수부족으로 해체되었다. 남은 아이들 중 그래도 축구를 좀 한다는 아이는 골키퍼와 공격수인 막내뿐이었다. 남은 아이들의 성화에 고등학교 때 축구선수로 뛰었다는 골키퍼 엄마를 코치로, 그리고 아내가 매니저 노릇을 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등록 하루 전에야 가까스로 11명을 채워 동네 축구 레벨 4에 등록하였다.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시합을 했다. 어떤 때에는 10명 혹은 9명이 뛰기도 하였지만 워낙 어설픈 탓인지 시작부터 4번의 경기를 연거푸 지고 말았다. 하루는 막내의 요구로 스포츠 매장에 들렀더니 이것저것 둘러보던 막내는 달랑 캡틴 완장 하나만 골랐다. 그리곤, 토요일 경기에 스스로 자신이 완장을 차고 아이들을 둥글게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다행히도 11명 모두가 모였다. 완장을 찬 덕분인지 그날 처음으로 이겼다. 그 다음부터 막내는 경기 때마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완장을 차도록 했다.
 
공도 제대로 못 차던 아이가 완장을 차면 신명들린 것처럼 상대팀이 위축될 정도로 날고 뛰었다. 완장차고 시합하는 날이면 엄마 아버지, 어떤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동원되어 왼팔에 채워진 캡틴 완장이 꼭 보이도록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여 곡절 끝에 시즌 22게임이 모두 끝났다. 막내 팀은 놀랍게도 12개 팀 중에서 5위를 했다. 톱 5가 되어 챔피언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막내는 결승리그 첫 게임엔 골키퍼에게 완장을 주더니 마지막 결승전에서는 본인이 완장을 차고 뛰고 또 뛰었다. 골키퍼의 놀라운 선방과 막내의 결승 한골로 챔피언 팀이 되었다.
 
챔피언 트로피가 수여되는 시간, 사회자는 우승팀의 캡틴을 불렀다. 막내는 완장을 차고 앞에 나가 마이크를 받아 처음 시작은 어려웠지만 모두가 캡틴이 되어 오늘 우승하게 되었다고 말한 후, 한명씩 호명했다. 나오는 순서대로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트로피를 높이 들고 함성을 질렀고, 그 부모들은 사진 찍기 바빴다. 가벼운 헝겊 완장의 위력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11살 때, 완장을 차게 되었다. 축구시합 때의 신나는 완장이 아닌 가장이라는 완장이 소리 없이 나에게 전수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언이었다며 모든 일들을 어린 나의 뜻에 따랐다. 완장의 무게는 언제나 무거웠다.
50 여년이 흘렀다.
 
나는 나의 완장을 성장한 큰아들에게 전수했다. 그러나 아들은 신 나 보이지 않는다. 뭔지도 모르고 완장을 받았던 나는 아버지 없는 집의 가장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는데, 대학을 마치고 직장 생활하는 큰 아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재벌 회장이 아들에게 완장을 전수할 때, 그 환희는 찬란한 미래의 환영이겠지만 힘겹게 살아온 내 완장 전수는 초라하기만 하다. 재벌 전수는 엄청난 재산이 물려지지만 아들이 받은 전수는 자신의 지출만 더 늘어갈 것임을 감지하기에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평생 수입 지출의 곡예 싸움에서 살아왔다.
 
당시 월급은 매월 말, 현금으로 지급되었다. 만 원짜리 지폐의 도톰한 월급봉투를 어머니에게 전하면 집안에 모처럼 활기가 돈다. 동생들이 눈독을 들이고 주시하는 가운데 어머니는 그 월급을 무를 썰어 깍두기를 담그듯 몇 등분으로 나눈다. 한 뭉치는 동네 입구의 구멍가게로, 또 한 뭉치는 쌀가게로, 또 한 뭉치는 연탄가게로 향한다. 몇 날이 지나면 또 외상이 시작된다.
 
젊은 날의 가족 부양은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반감 없이 때로는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잘난 척도 하며 지내왔으나, 현재의 상황은 힘겨운 가장을 벗어나고픈 심정을 들키고 만 꼴이다. 집 명의가 큰아들 이름으로 바뀌었다. 허울 좋은 가장이라는 완장! 모든 지출이 아들의 책임이 되었다. 집값에 거의 육박하는 은행 융자 상환금이며 갖가지 공과금들이 매월 큰아들 이름으로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평생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허탈하긴 하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니 나도 당당하고 싶다. 그러나 아들에겐 조용하기로 했다. 아들은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한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했듯이, 아들의 마음이 풀려 그 화풀이가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바뀌어 지기를 애써 기다린다. 억울할 것 같지만 곤고한 삶의 가장이라는 완장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믿기에, 힘들지라도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큰아들의 축복을 간구하게 된다. 올해 90이 되시는 어머니가 누이들 앞에서 내 평생 큰아들 때문에 이렇게 살아왔다고, 평생 미안하고 고맙다고, 죽어도 잊지 못한다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년에 완장 찬 손자의 반가운 소식들을 통하여 마음이 조금이나마 평안해지기를 소원해본다. 내가 완장을 전수받을 때의 상황과 지금을 생각하면서 아들이 전수할 때에는 지금의 몇 배, 아니 수백, 수천 배의 축복이 될 것이리라.
 
아이들이 완장 차던 날이면 신이나 뛰고 또 뛰던 아이들의 그 열정이 힘겨운 가장이 되는 나의 큰 아들에게 전수되기를 희망 한다.
 
장석재(2012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 대상 수상, 현재 <수필 동인 캥거루> 회장)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