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야기를 시작하렷다. 그에 대한 소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이야기 하나) 어느 기자가 싱가포르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갔다가 다섯 번 째 줄에 앉은 노부부를 보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당시 현직 총리였던 리콴유의 부모였다. 아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총리임에도 일반석에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여 기자가 질문을 하자, “내 아들이 총리인 것과 극장 좌석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리콴유의 아버지는 아들이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70세가 넘도록 작은 시계 수리점을 경영하며 평범하게 살았다. 
 
이야기 둘) ‘청렴의 상징’으로 불리던 리콴유도 총리시절 부정부패 의혹을 산 적이 한 번 있었다. 고급 콘도미니엄 구입 과정에서 분양금 일부를 할인받았다는 이유였다. 그 부패의혹은 사실무근으로 판명됐다. 고급 콘도미니엄 분양과정 때 분양금 할인은 싱가포르에선 사실상 관행으로 정착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친 것을 사과하며, ‘합법적으로’ 할인받은 금액의 전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이야기 셋) 1986년 12월 15일 아침, 리콴유 총리는 오랜 친구인 국가개발부장관이 밤사이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망인에게 달려갔다. 장관은 총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명예로운 동양의 선비로서 제 실수에 대해 가장 엄격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미망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부검되었고, 약물에 의한 자살로 확인됐다. 그는 4~5년 전 부하직원에게서 두 차례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해명을 위해 총리 면담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뒤였다.
 
리더의 판단력
부패에 대한 리콴유 전 총리의 결연한 태도는 유명하다. 동남아 특유의 관료에 대한 온정주의 문화가 투명성을 해치는 길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그는 국가적으로 부패 공무원을 숙청하는 작업을 벌였다. 자신의 정치적인 동지들이 수뢰 혐의로 수사 선상에 올랐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사법 절차를 진행하도록 검찰을 격려했다. “월급쟁이 관료가 명예와 사명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부패와 뇌물의 유혹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기업체에 어느 정도 비교 가능한 금액을 보수로 주어야 한다”는 공직 사회에 대한 운영 방침도 화제가 되었다.
 
그는 1959년 총리 취임 직후 “세금 전액을 공정하게 계산ㆍ분배하고, 한 푼도 새지 않도록, 모두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을 공언했다. 총리 직속으로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운영했다. 값나가는 것은 모두 뇌물, 청탁의 대상에는 아내와 자녀 혹은 대리인도 포함, 업무 연관성에 대한 증명 불필요 등이 기준이었다. 수입 이상의 호화생활도 재판에서 뇌물수수의 증거로 인정됐다. 단속과 처벌의 간소화가 핵심이었다.
 
그는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에서 깨끗한 정부가 강한 이유를 설명했다. “중요한 자리 공직자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관직을 그만두더라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비상시를 위해 여분의 재산을 따로 챙겨두어야 할 필요가 없다. 고위공직자들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때 모든 공무원들이 협동하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 점이 바로 공산주의와 대결해야 하는 다른 나라 정부와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다.”
 
효율적인 정부를 통해 고속성장과 깨끗한 사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의 리더십은 집권 3년 차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다 총리가 부메랑을 맞아 허걱거리는 박근혜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포퓰리즘을 배격한 리더십
“싱가포르에는 오직 싱가포르인만 존재한다” 리콴유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의 국민통합 정책을 펴면서 강조한 말이다. 말레이인·인도인 등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 다종교 정책을 시행해 민족·문화 갈등을 방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신이 안치된 이스타나 대통령궁 주변에는 민족을 불문하고 많은 국민이 몰려 깊은 슬픔을 나눈 것은 그의 불처럼 타올랐던 국민통합 열정을 보여준다.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한 그의 리더십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아시아 특수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싱가포르 국민의 신뢰를 받은 그의 청렴·통합의 리더십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려면 지도자의 헌신성, 국민통합 에너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리고 그는 포퓰리즘에 굴복하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해보라. 진정 국민의 바람이 무엇인가. 과연 원하는 기사를 쓸 권리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택과 의료, 일자리와 학교이다”라며, 국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면 인기 없는 정책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작은 국토와 높은 인구 밀도를 고려해 ‘껌 금지법’에다 교통 혼잡세와 차량 등록제까지 도입했다. 마약, 심지어 더러운 환경 방치까지 엄하게 처벌했다. 이 때문에 인구 1천명당 사형수가 세계 최고다.
 
리콴유는 30년 앞을 내다보는 비전가였다. 절대로 포퓰리즘을 자신의 집권연장에 써먹지 않았다. 싱가포르인들은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바닥권이라고들 한다. 좁고 엄격해 답답하니 그렇게 푸념한다. 싱가포르인들의 여론 근저에는 리콴유 총리를 “존경했으나 사랑하지 않았다”는 흐름이 있다. 그러나 국민을 아시아 최고부자로 살게 해준 공로로 지금도 투표장에 가면 인민행동당을 찍고 아들인 리센룽은 총리다.
 
그는 생전에 “싱가포르가 잘못되면 무덤에서라도 일어나겠다”고 할 만큼 조국의 지속 발전을 염원했다. 그가 떠난 싱가포르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 빈부 격차와 저출산 등으로 경제적 혼란이 심각하다. 싱가포르의 현실은 오랜 불경기와 더불어 갈등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리콴유처럼 국가목표를 불처럼 흔들림 없이 밀고나가면서도 시대의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킬 강력한 리더십이 절실하다. 
 
리더의 멘토
“그는 위대한 글로벌 전략가이자 정치 사상가였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와 오랜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다.”
 
‘서방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동갑내기 친구였던 ‘동방의 거목’ 리콴유의 별세소식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리콴유를 위해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장문의 추도사(제목 ‘세계는 리콴유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The world will miss Lee Kuan Yew)’를 통해 50년 가까이 쌓은 두 사람의 우정을 기렸다.
 
1970년대 중국을 상대로 ‘핑퐁외교’를 펼쳐 ‘죽의 장막’을 걷어낸 키신저 전 장관은 리 전 총리를 싱가포르의 국부뿐만 아니라 미중 간 역학 관계와 글로벌 질서의 핵심을 꿰뚫은 국제 정치의 멘토로 기억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뒤 초대 총리에 취임한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이 교수로 재임하던 미 하버드대를 찾아갔다. 미국 주도의 베트남전을 비판하던 교수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를 놓고 토론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 등 교수들에게 “당신들 말을 듣자니 역겹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국이 하나로 강하게 뭉쳐야 싱가포르의 독립과 번영이 가능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나와 비슷하게) 리 전 총리는 그때부터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하고 있었다”며 인상적인 첫 만남을 회고했다.
 
두 사람은 그 후 최근까지 각종 국제회의 등에서 수백 차례 만나 각종 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중국의 부상과 아시아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오래 전부터 교감했다고 키신저 전 장관은 밝혔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국제자문단 창립회의에선 동료 자문위원으로 만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당시 회의에서 “한국이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 안에서 나름의 아시아적 가치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 등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리 전 총리의 이 같은 혜안 때문에 역대 미 대통령들은 앞 다퉈 그를 워싱턴에 모셔 ‘한 수’ 배우려 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10월 그를 백악관에 초대해 아시아 정책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2010년 ‘아시아 회귀 정책’을 발표했다. 리콴유의 리더십에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그는 오로지 책임있는 리더십을 갈망한 ‘청교도’적인 사람이었다”고 요약했다.
 
“위대한 지도자는 종종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심지어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곳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끌기도 한다. 때때로 기존의 지혜를 거부하기도 한다. 리콴유는 좋은 교육, 부패 척결, 성과주의라는 수단으로 오늘의 싱가포르를 만들어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타계한 리콴유를 향해 “내가 아는 그는 감성적인 표현에는 서툴렀지만 싱가포르의 번영이라는 믿음을 갖고 항상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했다”며 “우리는 리콴유로부터 많이 듣고 배웠으며 앞으로도 그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추도사를 마무리했다. 키신저는 리콴유에 대해 총괄적으로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지의 오랜 의문에 후자라는 해답을 준 이”라고 극찬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리콴유를 가리켜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을 받는 리더가 드문 시대에 우리는 그의 리더십을 다시 조명할 필요를 느낀다. 
 
송기태 (논설위원/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