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하는 리더
리콴유는 탁월한 리더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 준 표상이다. 1968년 그의 나이 47세, 총리 재임 10년째 되던 해, 하버드 대학 정치대학원에서 두 달의 안식년 휴가를 보냈다. 기숙사에서 그는 일반 학생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세미나 참석, 교수 및 학생들과 토론, 하버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과의 교제 등을 통해 집중적인 재충전을 했다.
 
이후 그는 하버드와 케임브리지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그곳 교수들, 그 나라 리더들과 허심탄회한 토론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흡수했다. 또 1980년대부터는 거의 해마다 중국을 ‘학습방문’해 중국의 미래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야망과 동기와 전략을 듣고, 또 그들에게 조언해 주었다. 그래서 등소평의 시장 경제 전략 도입에는 리콴유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성인이 되어 베이징 표준어를 배웠고, 아들에겐 러시아어 공부를 시켰으며, 후계자에게 개인교수까지 붙여 연설수업을 시켰다. 72세가 넘어서 인터넷 공부를 시작, 아주 능숙한 웹 사용자가 되었다. 이처럼 리더는 끊임없이 갈고 다듬으며 학습하고 제련해야 리더십 역량으로 직결된다.
 
이처럼 그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과 깊은 통찰력을 지녀, 덩샤오핑에서 시진핑 주석에 이르기까지 중국 리더들의 스승 역할을 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부터 오바마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통령들도 그에게 조언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그의 학습내공은 컸다. 
 
DJ · 리콴유 사상논쟁 
싱가포르의 국부로서 그는 민족주의자의 면모도 수시로 드러냈다. 특히 대영제국과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를 번갈아 경험한 뒤 “강대국들에 갇힌 국민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알게됐다. 어느날 영국이 요지부동의 주인이더니 다음 날은 우리가 왜인이라고 놀렸던 일본이 근시안적 편견으로 싱가포르 국민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한 뒤 영국군이 싱가포르를 재탈환하자 “대영제국에 대한 복종과 존경이라는 옛 관습은 이제 사라졌다. 영국이 일본에 쫓겨 짐을 싸 도망가는 것을 싱가포르 국민이 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영국과 싱가포르의 옛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냉정한 현실 국가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리더십에는 항상 비판과 논란이 뒤따른다. 무엇보다 그의 통치 방식은 ‘온건한 독재’ ‘가부장적 통치’로 불렸다. 그러나 동남아의 다른 독재자들처럼 무력을 동원하거나 경제개발 과정에서 착취나 인권침해 논란을 초래하지 않았다. 노조활동과 임금인상을 억제했지만 성과급 제도를 적극 도입했다.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출을 유도하고, 공무원들이 부정부패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수를 공무원들에게 지급했다. 그를 지지하는 정치 전문가들은 그의 독재적 방식이 국가통치를 효율화하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독재적’이라는 비난에 대해, 서구에 비해 개발이 뒤진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했다. 이는 당시 아시아에 만연했던 독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1990년대 한국의 DJ와 사상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거부하고 자주적 정치체계를 만들려 애썼다.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 박정희 전 한국 대통령과 ‘닮은꼴 리더십’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 근간이 바로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가치’였다. DJ는 아시아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부작용의 폐해에 눈을 돌렸다. 한계를 극복하려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리더들 간의 이례적 사상논쟁이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지만, 지금도 종종 국제 심포지엄 화두로 오르내린다. 
 
물론 영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그가 자유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몰랐다거나 평가절하한 것은 아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길고 고통스러우니 도달 속도를 단축하기 위해 아시아적 가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 등이 아시아적 가치에 동조했으나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아시아의 정치, 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더 이상 아시아적 가치는 주목받지 못했다.
 
리더십의 족적
리콴유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 다양한 리더십의 족적을 남겼다. 특히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까지 나라의 경제기적을 일군 국가 리더인 그의 삶은 배불리 먹기 위해 권위적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정치관이 짙게 녹아있다. 그는 여론조사에 대해 “나는 결코 여론 및 지지도 조사 등에 과도한 관심을 두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약한 리더일 뿐이다.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리더의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생전 16세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신봉자였다. 마키아벨리가 어느 자리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상을 벤치마킹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었다”며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의미 없는 존재”라고 단언했다. 그는 ‘정적’과 관련해 “말썽꾼을 정치적으로 파괴하는 게 나의 일이다. 만일 말썽꾼과 겨루게 된다면 내 가방 안에 있는 날카로운 손도끼를 사용하겠다”면서 31년 간 철권통치를 펼친 사실상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그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집과 의료, 직장과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경시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민주주의의 가늠자와 같은 언론관이 이러니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지나친 원칙주의는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을 억압하기도 했다. 청렴했다고는 하지만 독재자란 굴레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2001년 홍콩 중문대가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려 하자 학생들이 ‘독재자’라며 거세게 반대시위를 벌인 적도 있다. 
 
이런 ‘냉혈인물’ 같은 면모를 가진 그도 부인의 죽음 앞에선 절절한 사부곡(思婦曲)을 감추지 않았다. 부인 콰걱추 여사가 2010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그녀 없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녀가 89세의 인생을 꽤 잘 살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겠다. 하지만 마지막 이별의 이 순간 내 마음은 슬픔과 비탄으로 무겁다”고 했다.
 
한시대의 리더
YS 정부 출범 당시, 한국 공무원들이 싱가포르를 배운답시고 어찌나 많이 갔던지 싱가포르 정부가 대사관을 통해 ‘업무에 지장이 많으니 자중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의 리더십은 아직도 유효한가? 
 
리콴유는 사회주의적 가치관에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가부장적 철권통치를 휘두른 국가리더이다. 작은 도시국가이기에 ‘리콴유식 개혁’이 가능했던 대목도 있다. 여타의 나라와는 사회구조의 틀도 다른 만큼 옥석을 가려 그의 리더십을 적용해야 한다. 1950∼1960년대 일반 대중이 무지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 것이 ‘리콴유 개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회수준이 높아지고 이해관계도 복잡해져 어느 나라든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부패청산 의지 등은 어느 정부든 일정부분 벤치마킹해야 할 대목이지만 지나친 엘리트주의, 국익 앞에 개인을 희생시킨 전제주의 등 부정적 유산도 많은 만큼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기도 한다. 특히 뛰어난 소수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는 엘리트주의는 가뜩이나 작은 도시국가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엘리트와 열패자 사이의 위화감이 심각하다. 국내 금융계조차 싱가포르투자청(GIC) 사람들의 엄청난 엘리트의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유모(乳母)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식의 전체주의적 운영 시스템, 31년간의 독재 및 이후 사실상의 수렴청정을 통한 권력유지 및 세습 등도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으로 꼽힌다. 리콴유는 1990년 고촉동 전 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줬다. 2004년 14년간 총리로 재임했던 고 전 총리가 물러나 리콴유의 첫째 아들인 리셴룽이 새 총리로 취임했다. 리셴룽 총리의 등장은 또 다른 형태의 권력세습이 아니냐는 지적도 많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치, 행정 분야 요직을 거치면서 리더 교육을 받았던 리셴룽 총리는 싱가포르 국민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대체로 존경받는 리더로 통한다.
 
어쨌거나 이런 부정적인 유산이 있지만 필자는 리콴유가 ‘성공한 국가리더’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진다. 먹는 물까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척박한 섬나라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나라로 일구는데 그의 리더십과 강한 의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사에 ‘if’를 대입하는 것은 허구일지 모르나, 만약 싱가포르에 리콴유가 없었다면? 이 물음에 답해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송기태 (논설위원/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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