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유난히도 달이 밝았다.?내가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니가 자세를 고치며 나를 바라보셨다. 방에 들어서다 무슨 줄에 발이 걸려 넘어 질 뻔했다.?어머니는 그 줄을 바라보며 웃으셨다.?내 어린 아들이,?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며 노끈 한쪽은 제 발목에,?다른 한쪽은 할머니 발목에 묶어 놓고는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갑갑할 터이니 풀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풀면 안 된다고 하셨다. 호주 이민을 준비하던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던 어린 아들의 간절한 심정이었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그 어린 아들이 장성하여 서울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한 달 여정 길에 먼저 올랐다. 91세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큰손자 며느리를 보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더니 이번에 그 소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시드니 공항까지 한 시간, 아들과 단 둘만의 공간이 생겼다.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출발하자마자 서로의 말문이 터졌다. 자연히 지나간 20여년의 기억들을 살려내는 시간이 되었다. 아들과 나의 기억이 하나가 되는 순간, 순간들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공항 배웅 후, 돌아오는 길이 매우 허전하다. 지난번 딸의 결혼식을 위해 배웅 할 때에는 아내와 딸이 동행 했기에 허전함을 몰랐는데 이번엔 혼자 보내는 것이 허전하기만하다.
집에 도착하니 공항에서 보낸 아들의 메시지가 와있다. 못 다한 말이라는 다정한 말들이다. 그래, 그래! 미안하고 고맙다 내 답장의 전부이다. 옆에 앉아 있는 아내의 눈시울이 벌겋다. 아들과의 메시지가 엄청 많다. 정말 아버지인 나로서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딸과 아들이 자신의 결혼식들을 스스로 준비하니 고맙기만 하다.
집안이 고요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막내는 학교에 가고 아내와 둘만 남았다. 방들을 둘러보니 그동안의 주인이었던 딸과 아들이 차례로 떠나 갔으니 이제는 조정해야 하겠다. 안방은 우리내외와 막내가 함께 쓰고, 그 다음 방은 딸아이가 그리고 작은방은 큰아들이 사용했었다. 우리와 함께 한방에서 지내던 막내가 언제인가 자신의 방을 요구하니 할 수 없이 큰아들의 방을 막내에게 양보하게 하고 큰아들은 썬 룸을 개조하여 방으로 쓰게 했었다. 지난해 딸이 시집가므로 큰아들은 누나가 쓰던 방을 오늘까지 사용했다. 이제 막내는 형이 쓰던 방으로 옮기고, 막내가 쓰던 작은 방은 내가 서재로 만들어 써야겠다.
딸이 결혼하여 나갔고 큰아들까지 나가니 허전하기만하다. 딸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면 칼링포드 이집이 아니라 준비된 새로운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언제나 늦게라도 들어와 잠을 자고 매일 매일 출근하던 큰아들이 이제는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뿐인 화장실로 인하여 일어나는 형제의 우선권 다툼도 없어지게 되었다.
딸과 큰 아들이 떠나고 막내와 우리 부부만 지내고 있는 첫날밤, 막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고, 큰 아들 방은 고요하다. 집 전체가 조용하다.
“엄마! 형아가 나를 귀찮게 해! 나를 간지럽게 해!”
“이놈이! 형이 안아 주는데 왜 그래?”
“야, 너는 우리 막내를 왜 힘들게 하냐? 그만 하지 못해!”
“그래, 누나야! 나 좀 구해줘!”
삼남매의 웃음소리와, 서로 다투는 것 같은 큰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자정이 지나가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20여 년 전,
손자와 손녀가 호주 시드니로 떠나던 날에도 어머니는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장석재(2012 재외동포 문학상 수필 대상 수상, 현재 <수필 동인 캥거루> 회장)
한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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