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벌어진 테러는 현실을 깨우는 경종이었다. 9.11사태로 드러나듯이 테러의 위협이 일반생활의 현실이 되어버린 현대서구사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중동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지금 내가 마시는 커피 한잔, 신나는 축구 경기와는 상관없을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왔다. 최근 들어 시리아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프랑스만의 문제, 일종의 자충수로 취급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예라고 말하기엔 아무래도 꺼림직하다. 이미 여러 테러사건으로 24시간 경계태세에 있었던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아무런 걱정없이 떠들고 놀 수 있다던 콘서트장과 축구장에서 끔찍한 살육이 일어났다. 아주 평범해야 정상인 사람들에게서 아주 평범해야 정상인 삶들이 방해를 받았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안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이 불가능해진 현실을 일깨워줬다.
 
아마도 지난 주일에는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으리라.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 현실의 책임을 ‘과격해진 이슬람’에게 돌리며 이들에 대한 ‘성전’을 외쳤을까? 얼핏 몇몇 교회 이야기만 들어봐도 이제 닥칠 이슬람의 위협에 대한 경고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것을 가지고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도는 나쁘지 않다. 어차피 이번 일이 없어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명이니까. 그러나 일부에서는 종말론적인 톤으로 이슬람의 융성과 이에 따른 기독교와의 갈등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주문한다. 주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할랄마크가 있는 식품 보이코트에 더 나서라고 외친다. 이들의 정치적 진출을 꺾고 기독교 문명을 지켜야 한다며..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보면 이들이 공격하는 서구사회는 기독교 문명이라고 말하기엔 기독교와 너무 상관이 없다. 몇 주 전까지 언론을 뒤덮던 동성애 합법화 물결이 이것을 보여주지 않은가? 더구나 서구사회에 대한 공격을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는 것도 억지다. 서구인들이 그동안 중동에 한 짓들은 별로 기독교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프랑스 테러의 뿌리에는 이슬람 자체의 문제보다 이들을 대하는 더 차가운 현실들이 존재한다. 프랑스 내 이민자들의 사회융합 실패, 계속되는 빈부차와 젊은 세대의 경제적 소외 그리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팔레스타인에서의 불의한 학살과 갈등….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아마도 지금처럼 자포자기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일들… 경찰을 늘리고 감시를 강화하고 시리아에 폭탄을 더 뿌리는 것은 뿌리는 그대로 두고 가지치기로 전세를 바꾸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전에 많은 시도들이 그랬듯이 확실히 실패할 시도가 될 것이다.
 
더구나 당장 우리 옆동네에 무슬림 친구들이 살고 있는 호주 같은 곳에서 경찰력을 강화하고 혹은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무슨 결과를 가져올까? 이럴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전’을 외치며 기독교 문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나서는 것이 성경적인 태도일까? 결국 이런 식으로 문제를 풀려면 미국처럼 각자가 총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것 같다. 그럼 곧 무슬림보다 더 평범하게 생긴 이웃들이 그 총을 들고 우리네 학교에서, 우리네 공원에서 또 총질을 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우리 얼굴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면서 ‘아시안 고우홈’을 외치면서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운 여론의 흐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호전성은 이미 많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도 보여주는 것처럼 균형을 잃은 종교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는 추악한 모습이다. 회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근본적으로 더 호전적인 종교라고 할지라도, 이들의 호전성을 자극하고 공격함으로써 문제를 풀 수는 없다. 반항아나 폭력적인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가?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교육학적 지혜가 간절해지는 때다. 문제 자체를 시비하기보다는, 그 아이의 문제를 만들어낸 뿌리의 상처를 싸주고 치료해주고 기대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지혜가 사실 교육학적 지혜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포기할 만한 대상, 폭력으로 자신을 못까지 박은 인간들을 향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회복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전쟁과 적대가 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석원(교육전문사역단체 under broomtree ministr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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