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첫 번째 목요일에 갖는 Local client meeting이 있는 날이다. 여느 날처럼 수영을 하고 기차를 타고 버우드 역에서 내려 약 20분간을 걸어서 갔다. 매번 그곳을 갈 때마다 걸으며 생각 중에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전에는 그런 것을 못 느끼고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요즈음은 단순히 숨 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물적인 삶 만을 산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함께 지금 내가 왜 이곳에 있으며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왜 저곳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인, 각자의 삶이 어떻게 보면 태고적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그 예정도 결국은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은 아닌지. 
 
아주 많은 돈을 번 사람을 살펴보자. 그 사람은 돈을 벌 수 밖에 없도록 살았을 것이다. 반면에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이 살았던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생의 고락에 대해 운명, 팔자 탓 만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밖으로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다. 성공했다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출세하였다고... 그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진정 중요한 것을 간과 한 것이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과연 행복할까? 첫 단추를 잘 못 끼웠기에 끝내 잘못되고 만 경우도 본다.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있는 진정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로지 자기 한 몸의 영광을 위하여 그저 자기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범한 삶이다. 
 
초원을 누비는 사자나 호랑이를 보자. 그들이 아무리 백수의 왕이라고 하여도 배고플 때만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지 배가 부를 때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들은 어떤가. 
이미 예정해 놓은 울타리를 벗어나 맘대로 선택하여 배가 불러도 목표물이 눈앞에 있으면 사냥을 마다하지 않는다. 숭고한 자연의 질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위하여 자기는 극기하고 노심초사 하는 위대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끝나는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남아 기림을 받는다. 극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밝다.
 
이들의 정신을 기리면서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원인(씨앗)이 되어 찬란하고 위대한 결과(열매)를 초래하지 않을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고난의 가시밭 길이지만 위대한 결과를 바라보며 걷는다면 고난도 고난이 아니다. 행복, 기쁨이 예쁘게 단장하고 “나 여기 있소.” 하며 다소곳이 앉아 있지는 않다. 그것을 찾아가야 하며, 찾지 못한다면 만들어야 할 것이다.
 
건전하고 순수함이 곁들인 이웃사랑(인류애)이 원인이고 꿈이라면 하늘도 도와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 수 있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의미를 찾지 못할 것만 같다.
 
임보형(글무늬 문학사랑회)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