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3월 1일자 창간호
열악한 환경 극복하며 ‘고급정론지’ 품위 지켜
 
최고 영향력 온/오프라인 미디어로 새해 새 출발
 
“호주동아일보는 호주 한인사회가 밝아지도록 언론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고달픈 이민생활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호주 한인들의 삶을 격려할 것이며 동포사회에서 불신의 장벽을 없애도록 정보의 소통과 나눔에 주력할 것입니다. 호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감시자 겸 제언자로서, 여론의 주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것입니다.”
(2011년 1월 7일 신이정 발행인 새해 인사 중 발췌)
 
1990년 3월 1일 창간된 호주동아일보가 2015년 12월 25일(금) 오늘자로 26년을 마감합니다. 새해 1월8일자부터 ‘한호일보’ 제호로 새 출발을 합니다. 해외 동포사회에서 사반세기 이상 일간지를 발행한 것은 북미주의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종간호를 발행하면서 아쉬움 등 많은 감회를 느낍니다. 지난 26년의 호주동아일보를 뒤돌아보는 특집을 정리했습니다. - 편집자 주(註)
 
1990년 3월 1일 창간
    
1990년 3월 1일 창간된 호주동아일보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호주 한인사회에서 선구자 및 동포사회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해온 고급정론지라는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이런 평가는 동포사회는 물론 호주 주류사회와 다른 소수민족 커뮤니티로부터 받은 평가입니다.  한인 인구가 1만여명에 불과한 90년대 초반 과감히 일간신문을 발행한 것은 한국어 일간신문 창달의 큰 뜻을 품은 재일교포 사업가인 고(故) 오직일 창간 발행인의 용단이었고 해외동포사회에서 거의 전례가 없는 사례였습니다.  
 
주간지로 2년 동안 100호를 발간한 후, 1992년 3월 1일 일간 호주동아일보가 재창간됐습니다. 오직일 창간 발행인 시절(약 10년)은 태동기와 초기 성장기에 해당합니다. 전경희 2대 발행인 시절(약 10년)은 사춘기의 시련을 극복한 단련의 시기였습니다. 투철한 언론관과 경영철학으로 많은 난관을 이겨냈습니다. 이어 2011년부터 현재의 신명길, 신이정 3대 공동 발행인 체제의 지난 5년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성장과 힘찬 미래의 도약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호주동아일보는 발행인들이 상당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26년 동안 일간지 발행을 고수해 왔습니다. ‘정론직필’의 정신을 지키며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온 사반세기였습니다. 
 
오직일 초대 발행인, 재일교포 출신 사업가의 열정
 
일본에서 당한 차별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오직일 초대 발행인은 3.1절을 창간일로 선택했습니다. 동아일보가 민족지라는 점과 김병관 동아일보 발행인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동아일보와 판권계약을 체결하고 한국 뉴스 콘텐츠를 제공해 왔습니다. 호주 뉴스/논평을 담은 호주동아일보를 1면부터 게재했습니다. 정식 판권 계약, 한국 중진 언론인 출신으로 편집 데스크 구성, 좋은 외부 필진 선정, 매일 인쇄와 배달, 가판 보급 등 출발부터 정도(正道)를 걸었습니다. 한국어로 된 매체에 목말라 하던 호주 동포들에게 한인 사회 뉴스와 함께 호주 뉴스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취재한 커뮤니티 소식을 전달함으로써 호평을 받았습니다.  
동포 상권의 제한 등 광고 시장의 협소함으로 인해 일간 신문사 경영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때론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오 발행인은 개인의 능력이 다하는 순간까지 신문발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지병으로 환갑 나이에 타계했지만 그는 진정 저널리즘의 가치를 존경한 초대 발행인으로서 호주 한인 언론계에서 굵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 1996년 고은 시인 초청 강연회(오른쪽부터 오직일 발행인, 고은 시인, 고직순 편집국장)
한국-호주 워홀비자협정 조기 체결 물꼬 역할
 
이 시절 호주동아일보가 큰 역할을 한 사례는 1994년 11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방호 시점에 맞춰 호주-한국 워킹홀리데이비자 협정을 조기에 체결하도록 촉구했고 그 성과를 얻어낸 점입니다. 한호 정상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질문을 통해 필요성을 제기했고 폴 키팅 당시 호주 총리의 협조로 한호 워홀비자 협정이 1년 후 체결됐습니다. 
 
전경희 2대 발행인, 어려운 시기 일간지 발행 고수
 
이런 전통은 전경희 2대 발행인 시절에도 이어졌습니다. 호주의 불경기로 더욱 많은 어려움이 닥쳤지만 꿋꿋이 이겨내면서 일간지 발행을 지켜왔습니다. 어려웠지만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를 썼습니다.      
동포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인 사회 규모도 성장했고 한인 신문, 잡지도 함께 늘어나면서 광고수주 경쟁도 한층 치열해졌습니다. 신문 콘텐츠의 질적 강화로 호주동아일보는 차별화에 주력했습니다. 

존 하워드 총리 2회 단독 인터뷰
 
호주 전문지로서 인정받는 단계에 도달했고 존 하워드 총리를 2회 단독 인터뷰하는 등 주류사회에서도 한인 커뮤니티 대변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신문사가 위치한 이스트우드는 호주 연방 지역구 중 한인 유권자 등 동포 인구가 가장 많은 베네롱의 중심입니다. 또 한국과 중국인 커뮤니티 상권이 자리를 잡은 곳입니다. 하워드 전 총리는 이런 베네롱에서 33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호주에서 두 번째 최장수 총리입니다. 
본지는 두 번째 하워드 총리 인터뷰 때 승원홍 한인회장과 박은덕 한인회 부회장을 총리에게 연결해 한인커뮤니티를 소개했고 위안부 호주의회(상원) 결의안 통과를 위한 로비를 했습니다. 호주와 일본의 우호 관계를 중시한 자유당 정책으로 결국 부결됐지만 의미있는 활동이었습니다. 
 
▲ 고직순 편집국장이 존 하워드 총리를 2회 단독 인터뷰했다
호주동아일보는 소수민족 신문(ethnic newspaper)으로서 한계가 있지만 호주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주류사회와의 교량 역할을 충실히 해왔습니다.    
한인들이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시민의식을 함양하도록 권유와 격려를 해 왔습니다. 책임있는 시민의식을 북돋우고 호주를 부강하게 하는 모범을 제시하는 기사를 발굴해 왔습니다. 

신명길 신이정 3대 발행인 20011년 이후 안정적인 성장 기틀 마련‘발전과 도약’ 5년.. 새해 ‘한호일보’ 새 출발 
 
신명길. 신이정 제3대 발행인을 맞은 호주동아일보는 인터넷과 휴대폰이라는 온라인 매체의 등장으로 종이 신문이 퇴조하는 현실에 대처하고 호주 한인사회의 비정상적인 언론 풍토를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변화와 도전에 나섰습니다. 언론의 외연을 확대하고 첨단 언론 매체를 적극 수용하는 ‘문화의 창조자’이자 ‘통합 미디어 그룹’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창간 원년부터 바둑대회와 1993년부터 신년문예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에서 차세대로, 단순 언론 기능에서 문화 혁신과 전파자로, 일방적 정보전달에서 독자와의 쌍방향 소통으로, 종이 신문에서 온라인 신문으로 기능을 더욱 강화하면서 사회적 공기인 언론의 공익 증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주한인공익재단의 호주 대학 언론학 전공자 1주일 한국 방문 프로그램과 공익 활동에 앞장선 단체나 개인을 시상한 호주 한인사회 발전지원금 수여식은 호주 한인사회에서 처음 선보인 언론의 공적 기능 확대 사업이었습니다.
 
한인 차세대와 호주 주류사회의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제고를 위해 2012년 영문 섹션 인사이트(Insight)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질적 차별화를 통한 한인사회 언론풍토 개선을 목적으로 2014년 3월부터 주말판 유료화를 단행했습니다.
 
또 2014년 12월 한국어와 중국어로 운영되는 호주 한인 최대의 모바일 앱서비스 마이시티(2015년 12월 아이탭(iTAP)으로 업그레이드)를 인수해 디지털 멀티미디어 시대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2015년 2월부터 개설된 호주동아문화센터는 시드니 한인사회의 고품격 한류 문화를 창조 전파하는 거점이자 언론의 공익 실현 모델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호주한인공익재단의 호주한인커뮤니티 발전지원금 전달식
 
호주동아일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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