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1710년경, 종이에 채색, 10.5 x 38.5cm, 국보 제 240호, 해남 윤씨 종가 소장

공재 윤두서를 만났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그 강렬함에 한동안 할말을 잊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 정면을 뚫어져라 보는 눈매가 압권인 얼굴이 허공에 둥 떠있는 모습은 기이하기조차 했다. 대담한 구성과는 반대로 긴 수염과 과장된 구렛나루는 한올 한올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사자의 갈기가 연상되었다. 그 비장한 표정 앞에서 나는 사자에게 먹히기 직전의 공포감마저 느꼈다.

배지에 채색한 상반신 저고리 부분은 오랜 세월 후 탈색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두상만 덩그마니 남은 현재의 모습은 결과적으로 작품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한다. 그렇게 윤두서의 모습은 실제 그를 만난 듯 강하게 내게 다가왔고 그 여운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을 넘어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천 점이 넘는 엄청난 양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가히 초상화의 왕국이라 불릴 만 하다. 이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시대에 조상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초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의 모습을 담은 어진에서부터 공로가 있는 신하를 치하하기 위해 왕이 내리는 공신 초상화, 그리고 사대부 초상화까지 수많은 초상화가 제작되었지만 정작 자화상은 극히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공재의 자화상은 현존하는 국내 최초의 자화상이자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자화상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하여 인물의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의식까지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철저한 사실주의 원칙에 따라 터럭 하나라도 사실과 다르게 표현하면 안된다고 여겼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초상화와 달리 대상을 절대로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만의 특징이다.  아무리 지체높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피부가 유난히 검으면 검은대로, 피부병이 있으면 있는대로, 짝짝이 눈매, 검버섯, 눈밑 다크서클조차 전혀 감추지 않았다. 인물의 내면을 중시하고 사실적 표현을 하였으므로, 학문을 통한 충분한 자아성찰의 과정을 거치고 예술적 표현 기량이 뒷받침되는 사대부 화가들만이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그 두 조건을 두루 갖춘 조선의 사대부 화가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문학, 수학, 의학, 천문, 지리, 회화, 서예 등 마치 르네상스의 다빈치를 연상시킬 만큼 다양한 관심과 재주를 갖춘 통섭형 인물이었다. 윤선도의 증손이자 정약용의 증조부로 명문가의 장손이었으나 서인과 남인의 첨예한 대립을 피해 평생을 출사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며 지냈다. 형제와 지기, 동료들의 반복되는 유배생활과 처절한 죽음을 지켜보며 그가 선택한 삶이었다. 유유자작하며 풍류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진정한 선비의 자세로 일생을 살아냈다. 또한 자신은 높은 사대부이지만 정작 서민, 노비계급에 매우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상 또한 풍속화로 남겼다. 양반이 서민계급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의 모델로 삼은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으로 후에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를 이끌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그 강직한 선비로서의 삶의 반추가 바로 이 자화상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명불허전, 윤두서의 자화상은 매우 간결하다. 서인 권력 아래 남인 사대부로서 은둔의 삶을 살아낸 그가 느낀 분노는 무엇이었을까. 정면을 향하는 시선에 처절한 정신세계가 보이고 그 외 다른 부수적 표현은 최대한 생략되었다. 관모없는 망건차림의 두상은 그래서 더욱 임팩트가 강하다. 조선시대 초상은 보통 살짝 측면으로 앉아 의복을 포함한 전신좌상을 묘사하는 게 관행이었다. 윤두서는 자신의 내면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사조를 따르지 않고 정면을 바로 응시하는 구도를 택했다. 그의 상처와 고뇌가 느껴진다. 그 대담성과 독창성이 바로 이 작품을 조선시대 초상화의 백미라 평가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렘브란트(1606-1669), Self Portrait with Beret and Turned up Collar, 1659, Oil on Canvas, 66x84.4c

비슷한 시기 서양의 초상화가로 렘브란트를 들 수 있다. 렘브란트는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초상화가로 자화상 또한 많이 남겼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렘브란트에 비해 공재와 그의 자화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영화 ‘관상’의 송강호 포스터가 공재의 자화상을 오마주했다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깊은 학문적 지성과 개인적 신념이 우러나는 공재의 초상이 내게는 훨씬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아, 나는 한동안 공재의 카리스마에서 헤어나지 못할것 같다.

이규미(NSW 주립미술관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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