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들을 저만치 뒤에 남겨두고 돌아섰습니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탈탈 털면서 뿌리치려는 기억들도 있습니다. 이대로 묻기엔 못내 아쉬워서 언제든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 가슴 한 켠 어딘가에 잘 모셔두고픈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새해엔 좋은 것만 주고 좋은 것만 받으면서 좋은 기억들만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이 이제라도 곧 열릴 것만 같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세상이 설마 열리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여전히 꿈꾸고 아파하는게 낫지 않습니까. 그래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야 사람 냄새가 나니까요.
       
꽤 오랫동안 칼럼을 쉬었습니다. 재충전을 하면 할 얘기가 좀 많아지거나 뭔가 좀 새로워질까 기대해봤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고, 그저 피로감이 쌓여가던 차에 숨을 좀 돌릴 틈새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고직순 편집인과의 오랜 인연 덕분으로 한호일보 창간에 맞춰 다시 칼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심리학과 심리치료가 우리에게 널리 유익하다는걸 알리고 싶은 마음에 칼럼을 시작했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시작에 즈음해서는 알리는 글보다는 함께 느끼며 나눌 수 있는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 이 시간들이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에겐 언제든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가만히 다독이듯 등을 쓸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옳은 소리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절실할 때가 있습니다. 지긋이 바라봐주고 때로는 괜찮냐고 한마디 물어봐주는 것도 좋습니다. 열마디 격려보다 말없는 기다림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굳이 조목조목 알아봐주고 칭찬해주지 않아도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노고를 위로해도 좋겠습니다. 어설픈 실수에는 못본 척 모른 척 밥 한끼 같이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 하나만 곁에 있어도 사는게 좀 나아지겠습니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시대가 해답이 아닙니다”
       
새로운 곳으로 떠날 때엔 이미 세상을 다 얻은 듯 희망에 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익숙해질 즈음에는 희망이 퇴색하면서 고달픈 현실로 바뀝니다. 그래서 지금 또 새로운 희망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찾지 못하는 희망이 다른데 있을리 없다는 것도 이제는 잘 압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상해져서, 때로는 실망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지만 익숙해지면 어김없이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걸 느낍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이 곳의 이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주는 감동이 참 따뜻하고 뭉클합니다. 그땐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고, 그땐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랬었습니다. 지금은 왜 이런가 생각하다가, 문득 25년 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땐 또 지금 이 곳 이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88 아니라 1998도 지금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런데 그땐 그 곳 그 사람들이 그리도 소중할지 미처 몰랐었습니다. 그때 좀 더 등을 쓸어주고, 넌 좋은 사람이라고 말 한마디를 해주고, 정말로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좀 더 오래 말없이 기다려주고, 밥 한끼 같이 하면서 뜬금없이 고맙다는 말 한마디 했어도 좋았겠습니다.
       
“시간은 매서울지라도 세월은 너그럽습니다”
       
과제, 고민, 어려움은 모두 지금 오늘 하루의 것입니다. 반면 보람, 감사함, 그리고 뿌듯함은 세월 속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심지어 지금의 고난과 고통 마저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으로 남겨집니다. 추억은 현재를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간은 고달프지만 세월은 푸근합니다. 죽은 과거는 묻고 미래는 의심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살며 행동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지금 현재를 보람있게 보내면 세월 속에 자긍심과 추억을 영원히 새겨넣을 수 있으니까요. 가끔 실수를 해도 괜찮습니다. 세월은 너그러우니까요.
       
모두 뿌듯한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김진관 임상심리전문가(Clinical psychologist), 심리학 박사, 김진관 정신건강 클리닉(www.jinkwankimclinic.com) 대표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