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16세기 영국의 금융가 토마스 그레샴은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관이기도 했다. 1558년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재정의 충언을 담은 서한을 바쳤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합니다”(Bad money drives out good).

이 말은 나중에 ‘그레샴 법칙’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구절이 된다. 여왕의 부왕 헨리 8세는 종종 은화의 40%를 일반 금속으로 대체해서 제조했다. 100실링짜리 은화에 100실링 값어치의 은이 함유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함량을 떨어뜨리고 명목만 100실링이라 하여 유통시켰다. 왕은 세금을 늘리지 않으면서 재정궁핍을 덜기 위해 그렇게 화폐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자 대부분의 상인들은 자연스레 100실링 값어치의 은을 함유한 은화(양화)는 깊숙이 보관하고 질이 명목상 100실링짜리 은화(악화)로 지불했다. 그 결과 시장에서 양화는 자취를 감추고 나쁜 은화만 유통되었다. 결국 악화가 양화를 추방하고 만 셈이다. 

가령 두 장의 지폐가 있다. 한 장은 은행에서 막 나온 빳빳한 새 돈이고, 한 장은 너덜너덜한 헌 돈이다. 이때 사람들은 새 돈(양화)은 지갑 속에서 잘 꺼내지 않고, 헌 돈(악화)으로 필요한 지불을 한다. 그러니 시중에는 질 나쁜 돈만 유통되고, 양질의 돈은 지갑이나 금고 속으로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양질의 돈이 저질의 돈에 밀려나고 만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품질이 좋은 제품 대신 저질 상품이 판을 친다는 법칙이다. 
그레샴 법칙은 경제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사회, 문화 각 분야에 어디든지 존재한다. 표독스럽고 악질적인 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을 내쫓기 십상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앙칼진 부인의 음성이 온순한 남편의 음성을 집어삼킨다. 소위 ‘가정의 그레샴 법칙’이다.

악화, 이세벨
이스라엘 7대왕 아합과 이세벨 부부에게 이 법칙을 대입하면 꼭 들어맞는다. 겉보기에 아합은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적 안정을 구가한 출중한 왕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업적을 전혀 평가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역대 최악의 통치자’로 최종 선고를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평생 ‘죄의 늪’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아합은 외교적으로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이들 부부는 세상에서 누릴만한 것은 모조리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병통치약 같던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 어느 것 하나도 진정한 행복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멸망의 촉진제였다.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은 모래성이었다. 
‘선민 이스라엘’의 심장부에 ‘바알신의 전도사’ 격이었던 이세벨은 이내 ‘이스라엘의 바알화’란 자기 소명(?)을 이루기 위해 진격했다. 이에 걸리적거리거나 코드가 맞지 않는 모든 방해물과 당당히 맞서 싸우며 선전포고 했다. 그녀에게 당시의 언론이었던 예언자들은 눈에 가시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스라엘 땅에 펼치고자 했던 ‘이상’은 ‘죄와 악의 빅뱅현상’을 불러왔다. 그들의 유사 가정, 유사 정치인, 유사 종교인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은 이 부부가 자행한 ‘나봇의 포도원 탈취 사건’이다.

아합, ‘1억 거지’
요즘말로 아합은 ‘1억 거지’였다. 999억을 가진 부자는 1억만 채우면 1천억이 된다. 그래서 늘 ‘1억, 1억’하며 억하심정으로 살아가니, 정작 가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1억 거지’로 전락한다. 아합은 알라딘 램프같은 ‘권력의 힘’으로 모든 건 다 갖췄다. 왕궁에 붙어있던 나봇의 포도원을 채마밭으로 꾸미면 천하에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한번 아합의 눈에 들어와 ‘필’이 꼽히자 그의 마음은 온통 그 포도원이 지배했다. 하와의 선악과처럼 보암직도 했고, 먹음직도 했고, 가짐직도 했다. 

‘아, 저 포도원으로 채마밭을 삼으면 이 궁정을 더 짜임새 있게, 더 아름답고 실용적으로 재편될 텐데. 저것만 내 손에 들어오면 삶 전체가 뭔가 좀 더 성공적이고 의미 있게 될 터인데. 아, 그러면 원도 한도 없을 텐데...’ 
마침내 포도원 주인 나봇을 궁정으로 불러 들였다. 
“여봐라, 짐이 값은 후하게 줄 것이니 네 포도밭을 팔도록 하라.”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럴 수 없음을 용서하옵소서.”
왕의 권위로 한 마디만 하면 당장 손아귀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러니 아합은 그 땅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불같이 일어났다. 더 큰 조건을 내걸며 나봇을 달래보았으나 허사였다. 
“네 포도밭보다 더 넓은 땅과 네가 원하는 만큼 돈도 주겠다.”
“폐하, 그 포도밭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입니다. 우리의 신께서 조상이 전해준 땅은 팔지 말라고 하신 것을 통촉하옵소서”
나봇이 ‘신의 이름’으로 말하니 ‘천하의 아합’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도모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것이다. 그러나 몰래 먹는 떡이 맛있듯, ‘금지된 땅’을 향한 아합의 욕망은 꺼질 줄 모르고 불붙었다. 끼니도 거른 채 드러누울 정도로 그의 갈망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내가 감히 이스라엘의 왕인데 이 정도의 권한도 없단 말인가?’
아합의 욕심을 통제해주지는 못했다. 마치 금단의 열매에 몸이 달아올랐던 하와 이후, 사람은 누구나 ‘브레이크 없는 욕망’은 갈수록 가속페달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 물건 -그 사람, 그 자리- 가 있으면 천하를 얻은 것같은 느낌이 갈수록 심해져간다. 그토록 갈망하게 만든 내적 결핍은 ‘1억 거지’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합은 처음엔 거절당한 모욕감이 마침내 분노로 불붙기 시작했다.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하다니? 고약한 인간! 이건 분명 나를 무시한 거야.’ 
‘1억 거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분노와 모멸감, 그리고 탐심이 뒤섞여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싸매고 침상에 누웠다. 아내 이세벨이 답답해 그 이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세벨은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교활한 미소를 띠며) “걱정 마소서. 나 이세벨이 누굽니까?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 멍청한 나봇의 손에서 포도밭을 뺏어 폐하의 소원을 풀어 드리오리라."

탐욕을 위한 부창부수
그 악한 계략을 짜면서도 아무 갈등 없이 남편과 아내의 호흡이 척척 잘 맞는다. 그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요, 그 남편에 그 아내였다. 가히 악한 일에 천재적인 전술전략을 세우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먼저 이세벨은 “나봇이 신과 왕을 저주하였으니 사람들을 모으고 재판 하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왕의 이름을 쓰고 어인을 찍어 나봇이 사는 동네 장로들에게 보냈다. 장로들은 지체 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나봇을 끌어다 재판했다. 

“네가 정말 신을 저주하고 아합 왕을 저주하였느냐?” 
그러자 치밀한 각본에 따라 나봇이 미처 변명할 새도 없이 동원된 부랑배 두 명이 나타나 크게 소리쳤다. 
“저놈은 신과 왕을 저주했소. 내가 직접 들었단 말이오.” 
“나도 들었소. 분명히 들었소.” 
“뭐라구? 정말로 신과 왕을 저주했다고? 두 명의 증인이 있으니 확실하지 않소”
드디어 장로들은 그 불충분한 증거에 의존하여 나봇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람들은 즉시 나봇을 동네 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죽였다. 이렇게 사악한 이세벨은 지능적으로 신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법의 보호를 받아야 순진한 백성을 법의 이름으로, 거짓 재판으로 잔인한 처형을 하게 했다. 

나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세벨은 손톱 밑의 가시를 뺀 기분으로 아합에게 간교하게 말했다. 
“폐하, 이제 나봇의 포도밭을 가지소서. 나봇은 신성모독죄와 폐하모독죄로 깨끗이 처형되었습니다.”
이세벨의 보고에 아합은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내려갔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한 그들의 지상 말로는 비참했다. 

지상의 마지막 선물
비록 왕의 면전에서도 신의 법에 따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려 했던 나봇을 그렇게 죽인 이들 부부에게 신은 마지막 긍휼을 베푸셨다.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죄를 지적하고 돌이킬 것을 명령했지만 듣지 않았다. 마지막 돌이킬 기회까지 놓친 이들의 지상 말로는 비참했다. 선지자는 개들이 이세벨의 피를 핥을 것과, 그 가문의 남자를 다 멸할 것이라는 처참한 운명을 예언했다. 

결국 아합은 전쟁에 나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가 전사하면서 흘린 피를 창녀들이 목욕하던 연못에서 씻을 때 개들이 와서 그 피를 핥았다. 탐욕으로 선량한 시민을 살해한  그의 죄와 심판을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세벨은 예후가 일으킨 쿠데타 세력과 맞섰지만 신으로부터 ‘멸망의 보증수표’를 받은 이상, 예언된 수순인 멸망의 구렁텅이로 추락했다. 예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과 아들 요람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이세벨의 귀에 들렸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아름답게 꾸밀 정도로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 쿠데타의 수괴 예후가 문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최후의 고함을 쳐보지만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곁에서 지키던 내시가 이세벨을 창밖으로 내던지자, 예언대로 개들이 그녀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녀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짓밟고 왕궁에 들어선 예후가 말했다. 

“이제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다가 장사를 지내주어라. 그래도 그 여자는 왕의 딸이었다.” 
남달리 잔인했고, 속속들이 아합의 집을 경멸했던 예후가 그녀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기에도 이미 늦었다. 이미 개들이 와서 그녀의 옆에서 서성이며 죽은 권력의 몸뚱이를 뜯어 먹었기 때문에 남은 것이라곤 두개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시체는 밭의 거름같이 방치되고 말았다. 이것이 악녀 이세벨의 최후였다. 
한 시대를 쥐락펴락 하던 아합과 이세벨, 양날의 칼인 권력을 사악하게 사용한 결과는 참혹했다. 

가장 추악한 악화
자신의 미모와 젊음을 유지할 목적으로 피를 채취하기 위해 무수한 처녀들을 희생시킨 헝가리의 백작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 중국 황실을 피로 물들인 한나라 여태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로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손자까지 살해한 당나라 측천무후, 투기와 질투 표독함의 대명사인 장희빈 등등이 역사 속에 드러난 악녀들의 이름들이다.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성경 속의 가장 추악한 악녀가 있다면 단연 이세벨이 아닐까?
결혼은 “남자가 자신의 완전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예식”이라고 했던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악화’인 한 여성의 등장은 무엇보다 양화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던 한 남편을 망쳤고, 그 둘의 인생도 파산하고 말았다. 신의 경고 앞에 몸을 사리면서도 우유부단했던 악화, 아합은 더 추악한 악화, 이세벨에 의해 구축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 왕조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송기태 (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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