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목동 
이스라엘 국기에는 정삼각형과 역삼각형을 포개놓은 이른바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통일 이스라엘의 2대왕 다윗왕(이하 다윗)의 위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윗의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성경 사무엘서는 셰익스피어의 낭만적 서정성과 비극적 장엄함,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기지와 프로이트의 현대 심리학적 통찰이 엿보이는 천재적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마키아벨리, 프로이트 이상으로 솔직한 성서의 저자는 다윗에 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다윗은 복잡하고 모호한 인간의 경험들을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시골 목동 출신으로 왕이 된 그는, 승률 0.00001%도 안되는 게임(사실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성서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하면 고개를 끄떡일 이 드라마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골리앗, 그는 누구인가? 신장 210센티, 청동투구에 전신갑주를 두른 그가 베틀채같은 창날을 들고 있는 모습 그 풍채 자체가 벌써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를 시골 목동이 조약돌 팔매로 쓰러뜨렸으니, 요즘말로 표현하면 최신 박격포를 몰고 오는 적장을 장난감 칼로 목을 벤 것과 진배없다. 이처럼 그는 용맹한 군인이었으며,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을 질병을 음악으로 치료한 ‘음악치료사’의 원조이며,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이며, 탁월한 통치자였다. 무엇보다 다윗은 한 사람에게서 선과 악, 성(聖)과 속(俗)이 한 인간의 삶에서 똑같은 비중으로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을 일깨운다.

다윗에 대한 성서의 꾸밈없고 솔직한 묘사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적국의 왕으로부터 위협을 받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친 척 한다. 이때는 거짓말쟁이이자 협잡꾼으로 그려진다. 아름다운 아내를 둔 어느 부자에게서 곡물을 받아내기 위해 무리한 방법을 쓰고, 결국 여자와 곡물 모두를 손에 넣는 모습은 꼭 무법자나 약탈자처럼 묘사된다. 또 중요한 예식에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미친 듯이 춤추다가 겉옷이 날아가 군중 앞에서 성기가 노출되었을 때는 노출증 환자처럼 보인다. 이를 지적한 아내에게 되레 무안을 주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적반하장의 전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침실코미디, 비극을 향한 질주
그를 ‘한 방에 훅’ 가게 한, 그의 개인뿐만 아니라 성서시대 전 역사의 전환점은, 억누를 수 없는 성적 긴장과 예리한 도덕적 위기감으로 ‘신의 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게 한 극악무도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국방장관을 비롯한 부하들은 다 전쟁에 출전한 전쟁 중에 당연히 출전해야 할 왕은 낮 새도록 잤다. 저녁 때에야 잠이 깬 다윗은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옥으로 다듬은 듯이 아름다웠다. 즉시 채홍사를 보내 신상을 털어보고, 그녀를 데려오게 하였다(사무엘하 11:1-2 각색).    

여기서 다윗은 강렬한 한순간 속에 정지된 듯하다. 신의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도발적인 광경에 과감히 등을 돌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금지된 쾌락을 찾아 ‘악의 열매’를 딸것인가? 그가 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답게 유혹을 물리칠 것인가? 아니면 기름에 목욕하고 불꽃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불길에 도전할 것인가? 정지된 듯한 모든 순간은 아주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다윗은 경건함보다 쾌락을 선택했고, 평생에 그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선택한 쾌락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 

다윗은 간통의 가장 난처한 증거를 손에 받아들여야 했다. 얼마 뒤, 여인은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자신의 간통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자궁에 들어있는 사생아의 아버지가 남편의 것으로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남편을 불러와 동침케 하는 일이었다. 

“그대는 전쟁 중에 특별히 고생했소. 이제 그대의 집으로 내려가 발을 씻어도 되노라”
“전하, 성은이 망극하오나 소인의 상관 요압 장군과 동료들이 전장에 있는데, 어찌 소인만 홀로 집으로 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겠습니까? 살아계신 전하께 맹세하오니, 소인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소이다.” 

첫째 작전에 실패한 다윗은 다음 날 잔치를 베풀고 계속 잔을 권했다. 그가 술에 취하면 유혹에 굴복하여 부인과 동침하리라는 얄팍한 계산도 들어맞지 않았다. 마지막 카드로 국방장관에게 가장 치열한 전투에 그를 배치해 죽게 하여 마침내 그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리하여 ‘침실 코미디’는 비극으로 끝날 완벽한 구성미를 갖췄다. 하나의 죄악은 그를 은폐하기 위해 맹목적이 되고 만다. ‘관음증-간음-가정파괴-살인교사-살인’의 메카니즘으로 또 다른 범죄를 물고 왔다.  

관음증의 진화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왕인 다윗이 이토록 어처구니없이 무너진 근본요인이 된 관음증의 유래는 이렇다. 

11세기 중엽, 런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코벤트리 마을의 영주인 리어프릭도 악덕하기로 소문났다. 반면에 영주의 부인 고다이바는 남편과 달리 그 누구보다 농민들의 고달픔에 가슴 아파한 여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민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딱하게 여긴 고다이바 부인이 영주인 남편에게 무자비한 세금 징수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계속 남편은 거절하다 끝내 리어프릭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라. 그러면 세금 낮추는 걸 고려해보겠다”
‘설마 알몸으로 거리를 나서겠어?’라는 생각에 던진 농담이었지만, 부인은 번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마을을 돌기로 했다. 부인이 거사를 치르던 날, 농민들은 절대 부인의 알몸을 훔쳐보지 말자는 굳은 결의를 다졌다. 집집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마을은 쥐죽은 듯한 적막과 의도적 무관심에 휩싸였다. 그리고 부인의 숭고한 희생에 남편인 악덕도 감동했다. 그는 세금을 낮추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돼 이후 마을을 자비롭게 다스리기까지 했다.  

모든 일에는 곡절이 있는 법. 이때 양복 재단사 톰이 성적인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문의 커튼을 들췄다. 고다이바 부인의 알몸을 보는 순간 눈이 머는 저주를 받았다. 관음증 환자를 일컫는 ‘Peeping Tom’(엿보는 톰)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한다. 

이제껏 살펴본 다윗을 비롯해 어느 시대에나 ‘톰’은 존재한다. 그런데 요즘 톰들은 이전의 톰과는 또 다르다. 최첨단 정보기술(IT) 기기들로 무장해 몰래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이를 온라인에 공유까지 한다. 갈수록 ‘진화하는’ 최첨단 관음증 환자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한 남성이 셔츠 단추를 여민다. 셔츠 앞 포켓에는 언제 쓸지 모르는 볼펜을 꽂아뒀다. 거울을 쓱 한번 보더니 넥타이를 다듬어 맨다. 거울 속에 비친 남성의 검정 안경테가 반짝인다. 왠지 허전한 왼쪽 손목에 메탈 시계를 차고 그가 차키를 집어 들었다. 지금 이 남성의 몸에는 ‘패션 소품’을 가장한 초소형 카메라가 6개 달려 있다.

이런 ‘도촬 남성’ 대열에는 경찰대학 출신으로 사법, 행정, 입법고시를 합격한 ‘고시 3관왕’도, 유명대학 교수도 한 이름씩 올리며 그 좋은 직장에서 ‘한 방에 훅’ 잘려나간 경우가 잊어버릴만하면 꼭 등장한다. 

송기태 (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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