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를 중심으로 이민교회가 삼백여 개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좀 됐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으니 짐작이지만 그런 분위기는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자들 모임dp 나가면 내가 모르는 분들이 더 많아진 것도 그렇다. 이제는 가봤자 뻔하지 싶은 모임조차 다시 나가볼까 싶어질 정도니까.

그동안 기독교회 특히 개신교회의 숫자는 주로 조롱거리였다. 가장 창업비용이 적게 드는 한인업종이란 조롱투부터, 자기 교회 안에 교인을 가두어 놓는 반사회적 조직이라는 날이 선 비판도 들린다.

사실 개신교회의 다양성은 태생적인 운명이다. 신앙의 중심을 베드로부터 이어진 조직 교회에 두는 가톨릭과 달리, 성경을 통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가르치는 것이 개신교회다. 그러나 성경 해석도 성령 감화도 개인, 사회, 역사적 상황에 한 목소리만 나오기 힘들다. 덕분에 개신교회는 다양한 계층과 그 필요에 매우 기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헤비메탈 매니악도 좋아할 만한 모임부터, 그레고리안 성가를 고집하며 중세로 돌아간 것 같은 자리까지...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기업 같은 교회로부터, 탈북자나 외국노동자인권을 위해 뛰어다니는 인권단체같은 교회까지... 다양하기 이를 때 없다.

그렇다면 호주 한인교회 삼백교회 시대는 장점이 없을까? 두 가지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는 더 다양한 사역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쟁이 심하면 규모 아니면 특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물론 더 눈에 띄는 것은 규모의 경쟁이다. 안식과 자녀교육을 핑계로 큰 교회로 옮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의 동기가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막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교계를 이루는 다수의 교회들은 그런 ‘큰 교회’가 아니다. 특히 새롭게 생기는 교회들은 남과 다른, 분명한 ‘성격’, ‘특징’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가르치는 내용이든 교회 운영방법이든, 전에 비해 더 분명한 목적, 더 뚜렷한 대상, 더 분명한 원칙을 강조할 것이다. 덕분에 뭘 누굴 위해서 하는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았던 교회 사역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절박하지만 속으로만 품고 있던, 그간 소홀히 되었던 내 영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기회가 늘지 않을까?

둘째는 교회 연합활동도 더 늘어날 것이다. 교회 연합이 더 쉬워졌다는 말은 아니다. 교계를 대표하는 기존단체들의 대표성 시비도 전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내 말은 교회가 많아질수록 이들을 엮는 종횡 연대 시도와 성공률도 더 늘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신학교나 전문사역팀의 출현도 그렇고, 교단들이 늘어가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점에서 호주한인교계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은 더 힘들어질지 몰라도, 작은 단위의 연합은 전에 비해 더 흔해질 것이다. 더 다양한 연합활동으로 교회 안에 갖혀사는 운명에서 좀 더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물론 속편한 소리나 한다고 욕 먹을지 모르겠다. 현실 속의 삼백교회 시대는 더 많은 윤리 문제, 더 시끄러운 갈등으로 이미 넘쳐나고 있다. 다양성을 누리고, 연합 기회가 느는 것도 아직은 현실이라고 하긴 힘들다.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더 자질구레한 그룹’으로 나누어질 뿐, 세대와 계층을 연결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더 찾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연합 속에서 더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더 큰 실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회는 항상 문제뿐 아니라 기회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런 기회를 만들 주도권이 나에게도 있을 수 있음도 잊지 말자. 귀찮다고 가만있지 말고 더 다양한 사역, 특화된 사역에 관심을 더 가지고 시도해 보자. 좀 힘들더라도 작은 규모와 영역 연합 기회를 만들어 신앙의 폭을 조금이라도 넓혀보자. 그러면 신앙생활 하기가 확실히 더 즐거워질 것이다.

김석원 목사(로뎀나무아래 교육선교회, dave.sw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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