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카페에서 비교적 한가한 때는 아침나절이에요. 이 시간이며 대체로 레인보우 롤리킷이나 잿빛 크레스트 피죤 같은 동내 새들이 카페 앞마당으로 우르르 몰려와 셰프가 뿌려놓은 모이를 쪼거나 수도꼭지에 거꾸로 매달려 부리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 마십니다. 또 쿠링가이 국립공원 쪽에서 물안개를 제치고 떠오른 해는 너도밤나무 위에서 초록빛 그물망을 베란다 데크 위에 펼쳐 놓습니다. 사장님이 컴퓨터 앞에 앉아 친구들과 페이스북에 연결되어 잡답을 하는 사이 셰프는 텔레비전으로 폭스 스포츠뉴스를 시청하고 양마담은 카운터에 앉아 잡지를 요란스럽게 넘깁니다.   
 
근데 이 조용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모닝 티를 드시러 마가렛 할머니가 카페, 쿠링가이를 찾아오세요. 올해 여든 셋인데도 지팡이도 없이 꼿꼿하게 걸어오신 할머니, 붉은색 펠트 모자를 벗어 벽에 걸어놓으신 후 저희 카페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입구 쪽 창가에 앉아 한 조각의 피칸파이와 얼그레이 홍차를 주문하십니다. 저 청이가 파이를 데우고 차를 준비하는 사이 할머니는 쿠링가이 포스트를 펼쳐놓고 정치나 경제면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신 채 오로지 십자말풀이만 하십니다. 끈이 달린 돋보기를 콧등에 걸은 채 노란색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십자말의 가로세로 빈칸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해서 찻잔을 들고 가는 제가 발을 떼기 죄송할 정도입니다. 
   
마가렛 할머니는 70세 되던 해에 쿠링가이 군청에서 시행하는 시니어를 위한 피아노교실에 출석해 손자뻘인 시드니 콘서바토리엄 음대생들한테서 피아노를 배우셨습니다. 이미 손가락이 굳을 대로 굳어 손놀림이 쉽지 않았을텐데도 하루 세 시간씩 매일 연습하셨다고 하네요. 지금은 실력이 늘어 꽤 많은 곡을 악보 없이 치신다고 합니다. 저 청이, 십자말풀이를 완성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할머니께 집에 가시면 혼자 뭐 하시냐 여기서 좀 더 쉬시다 가시라고 붙잡으면 큰 소리로 대꾸하십니다.

“너는 몰라서 그렇지. 내가 이래봬도 아주 바쁜 사람이야. 병석에 누운 사람들 찾아가 말벗도 돼줘야 하고 널싱홈(양로원)에 들러 쇼핑 심부름도 해줘야 하거든. 일주일 동안 노인들이 당신들 필요한 품목, 가령 치약이라든가 비누, 소화제나 해열제 같은 의약품, 손주를 위한 생일카드, 와인, 브러시, 꽃 등을 적어놨다가 돈하고 내게 전해주면 그걸 들고 쇼핑센터를 한 바퀴 돌아오지.”

게다가 마가렛 할머니는 젊은 시절 파티에 갈 때 입으셨던, 이제는 색이 바래고 유행도 지난 드레스를 옷장 속에서 꺼내 예쁘게 치장하고 실버타운이나 양로원을 찾아가신답니다. 언젠가 저도 셰프가 챙겨준 아몬드 쿠키를 들고 따라가서 보니 할머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옷장 속에 유행 지난 드레스처럼 아주 오래된 노래들 가령 패티 페이지의 <테네시 왈츠> 같은 곡을 연주하고 계셨어요. 그럴 때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은은히 번져가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온종일 자기 방에 누워 계시거나 휴게실에서 텔레비전만 보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나둘 강당으로 모여 들어 함께 노래도 부르고 좀 기력이 있으신 분들은 춤까지 추신답니다.

근데 할머니는 이런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는 병문안이나 양노원 방문이 꼭 그 분들한테만 도움 되는 건 아니라고 하시네요.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시다보면 할머니 몸 아프신 것도 스르르 사라지고 남을 돕는 것에 보람을 느껴 자신의 삶에도 큰 만족감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일상이 바로 <봉사>, <사랑>, <낭만>, <만족> 등으로 연결되는 십자말풀이 같아요.

박일원(수필가)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