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기 짙은 골
세발솥에 차 끓는 소리
언덕배기에 나그네 스님 갈 길은 먼데
저 하늘에 구름은 왜 그리 골이 깊은가

한가로운 학은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고
그 아래 성외산장(城外山莊)
늙은 양주는 어이 그리 다정한지고

저 청이, 지금 위 글에 나오는 ‘성외산장’에 놀러와 차를 마시며 벽에 걸린 족자에 씌인 한시를 보고 있어요. 한시를 읽지 않고 보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저 청이, 한문을 읽을 줄 모르거든요. 때문에 그 번역본을 머리에 떠올리며 보고 있어요. 이 시는 여기 ‘성외산장’의 주인이신 할아버지의 친구 양명(楊明)이라는 분이 여기 사시는 두 내외분을 보고 지어 준 거라고 하시네요. 양명 선생은 이 댁의 당호를 ‘성외산장’이라 이름 짓고 편액에 들어갈 글자도 써주셨는데 ‘성외산장’은 이 동네가 영어로는 ‘캐슬힐(Castle Hill)’이기에 거기서 유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양명 선생은 중국인으로서 맥쿼리(Macquarie) 대학에서 서예과장을 역임하셨고 한문의 명필이시며 한학자라고 합니다.

저희 사장님이 선배님이라 부르는 성외산장의 주인을 오늘 양마담 언니와 다시 뵈러 온 것은 호주에서 태어나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문외한인 제가 조금이라도 조상의 뿌리를 이해하고 싶어 어른들을 졸라 이루어진 것이랍니다. 지금 제가 앉아있는 이 방은 주인 할아버지가 한실로 꾸며놓은 곳으로 방 한가운데에 교자상이 놓여 있어요. 정면에는 반닫이가 있으며 그 위에 붓걸이와 달을 닮은 항아리 그리고 홍콩 제이드 마켓(Jade Market)에서 사왔다는 돌짐승 둘이 반닫이 위 양편을 지키듯 서있네요. 

다른 벽에는 정조대왕의 화성능행을 그린 반차도의 일부가 걸려 있어요. 이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1795년 2월에 채제공을 비롯한 문무관료 1,779명을 이끌고 8일에 걸쳐 화성(지금의 수원)으로 행차를 하였을 당시 수십 명의 궁중화원을 동원하여 완성한 그림이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할아버지는 원래 미술에 소양이 있어 서울미대를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으로 전공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평생을 지내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이 되어 미술과 관련된 얘기는 이 댁에서는 금기사항이지만 메인 라운지에는 부인의 초상을 비롯해서 여러 점의 추상화들이 걸려 있네요. 저 청이,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그렇게 관심 없어 하시면서도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고 하자 겸연쩍어 하시는 말씀이 “그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끄적여 본 것”이라고 하시네요.

할아버지께서는 해외건설초기인 70년대 말에 한국내 경험을 토대로 삼성건설의 수주책임을 지고 당시 한국과는 정식 외교관계도 없었던 중동의 L국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3년만에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5억불의 건설계약을 성사시킨 것을 비롯해 8년여 동안 중동의 사막에서 종횡으로 활약 하시다가 80년대 말에 호주로 이민 오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할아버지께서 미군부대 클럽에서 일하시다 중동에 가셔서 호텔에서 근무하셨다는 이야기는 완전 낭설이며 저희 사장님의 공상에 불과할 뿐이지요.   
  
요즘 들어 할아버지가 제일 바라는 일은 나이에 상관없이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집에 불러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라운지 한켠에 마련된 홈바에서 손수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거라고 합니다. 주방에서 사모님과 함께 만들어 내는 서양식 퓨전요리가 지인들에게는 정평이 난 지 오래라 누구라도 성외산장에 오시면 잠시 근심걱정은 잊고 행복의 나라로 들어서는 거라고 저 청이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술한잔 걸치신 날에 집안에 설치된 노래방기기에 맞춰 즐겨 부르시는 최성수의 ‘동행’의 가사처럼 할아버지는 늘 누군가를 찾아 정을 나눠주시는 그런 분 같습니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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