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묻는다. “영사관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선거하라네요…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투표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지요?” 이심전심이다.

그러나 이런류의 고민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지독하게 평안해 보이는 호주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조만간 상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룰 태세인 연방정부를 봐도 ‘투표할 맛이 싹 사라졌는데 누굴 뽑지?라는 고민이 이어진다. 더구나 이번에는 연방상원투표법도 개정된 덕에, 주요정당 외의 당에 투표함으로서 기존 정치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힘들어질 것 같다.

이런 고민에 대한 가장 흔한 반응은 ‘기독교 당’을 만들자는 반응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호주에서나 이런 당들이 잘해야 동성애문제나 중절 문제 같은 개별 이슈에나 ‘기독교적’ 목소리를 낼 뿐이다. 도리어 우리 생활을 실제로 지배하는 경제나 이민 같은 복잡한 사안에서는 다른 ‘덜’ 기독교적 당들하고 다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여기에 낀 많은 지도자 중에는 교계 안에서 조차 존경받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점일 것이다.  

또 다른 반응은 당에 상관없이  ‘로비’를 선호하기도 한다. 호주의 ‘크리스찬로비’ 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신경을 좀 쓰는 분위기다. 그러나 막상 주요 교단들은 이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고, 대변하는 정체도 분명치 않다. 인종차별법과 동성애결혼법 논쟁이 끝나면 어떤 이슈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할지 궁금해진다.

막상 교계 안에도 교단 경계를 넘어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반공 보수의 보루인 한국에서조차,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항상 존재해 왔다. 이점에서 정당이나 로비같은 방법으로도 이런 다양성을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가 국가권력을 보는 성경 자체의 관점 때문에도 그렇다. 성경에는 바울류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권위’라는 개념과, 요한류의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사단의 대리자’같은 이미지가 공존한다. 때문에 기독교는 정치를 ‘긍정’과 ‘부정’ 속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 둘이 다 섞여있는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회색지대라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개인과 공동체가 각자가 처한 현실과 이슈에 따라,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새롭게 성령 앞에 내어놓고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점에서 기독교인의 정치권력에 대한 반응은 항상 시대적 상황적 필요에 영향을 받고, 개인 신앙수준을 드러내는 자리이자, 하나로 강제할 수 없는 다양성이 당연시되는 영역이다. 여기에 깔린 가장 ‘최소’ 원칙은 현재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끊임없이 검증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문에 나는 투표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표를 거부하는 식으로 체제를 부정하기 보다는, 체제 안에서 지지나 비판을 드러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런 장황한 이야기보다는 이 한마디가 더 설득력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선거에 참여하는 성실성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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