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년 현재, 이제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인간과 함께 보편적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있다. 2016년 3월, 구글(Google)의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가 당시 인류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을 4대 1로 누르고 전 인류에게 충격을 준 지 30년만이다. 당시 구글은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류가 보다 윤택한 삶을 살게될 것이라 했지만 수천년 세월의 지혜가 축적된 인류 최고의 바둑 천재가 간단히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절망했다. 나역시 그상황을 지켜보며 그동안 봐 온, 인간이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수많은 SF 영화를 불안하게 떠올렸다. 그 Science Fiction들은 이제 더이상 Fiction이 아닌 Non Fiction이 되어 있다.

친구 중 하나는 얼마 전 팔순기념으로 고성능 AI 기능이 탑재된 실버용 로봇을 구매했다. 일반화된 가사 도우미 기능 외에 말동무 친구 기능이 추가된 최신형이다. 나이들면 더 돈이 필요하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이다. 요즘 그 친구는 최신 로봇 친구 덕에 남편 잃은 외로움을 훨씬 덜 느낀단다. 가끔 뜬금없이 엉뚱한 소리를 해서 두어번 아프터 서비스를 받았단다. 자기 전 충전하는것만 잊지 않으면 그런대로 아주 유용하다는데..아직은 값이 좀 비싼게 흠이다.

산업혁명이 인간을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시켰다면 인공지능 혁명은 정신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우리는 이제 병원에서 의사 대신 인공지능 컴퓨터와 상담하고 그로부터 처방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인간은 전통적 노동 시장에서 완벽하게 소외되었다. 

입지가 좁아지기는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데이터를 기본으로 하고 사고력과 상상력까지 갖춘 인공지능이 아트의 영역까지 밀고 들어온건 어쩌면 충분히 예측할만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컴퓨터가 아티스트의 작업을 도와주거나 표현 방법중의 하나로 이용되는 정도였지만 어느새 아트 작품의 주체가 호모 사피언스가 아닌 인공지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애완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의 인격(?)조차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수년 전에는 이곳 호주의 초상화 공모전 아치볼드(Archibald)의 당선작이 부정으로 인해 전격 취소된 일도 있었다. 작가가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이다. 호주의 세계적인 뇌과학자 Dr Andrews의 초상을 나노기법을 응용해 페인팅한 작품이었다. 당선작이 다른 작품으로 바뀌면서 매우 시끄러웠지만 그해 아치볼드는 어느해보다도 많은 수의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가장 인기있던 작품은 물론 닥터 앤드류스의 초상이었다. 당시는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이 제작한 작품을 보는게 그리 낯선 일도 아니다. 수십년 전 역시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이 제작한 아트작품은 기존의 이미지에 또다른 이미지를 무작위로 합성하는 수준으로, 별 호감을 주지 못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며 이제는 많은 면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작품들은 완벽하게 계산된 에스테틱 감각 뿐 아니라 의외성과 반전의 묘미까지 더해져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특히 옵아트(Op Art) 작품이나 극소형 혹은 초대형 4D 설치작품과 쌍방향 비디오 아트 부문에서는 탁월한 예술성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저작권이라도 붙여줘야 할 판이다. 

아트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새로움’을 향해 달려온 기나긴 여정이었다. 앞선 개념이나 테크닉을 얼마만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이용하냐에 따라 작품의 참신함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컴퓨터 기술의 도움을 받거나, 인공지능이 상상력을 탑재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그리 다른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인듯 예술아닌 예술같은' 그 작품들이 감성과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결국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위안을 제공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규미(Community Ambassador, NSW 주립미술관)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