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도 한일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다. 재일동포의 수는 64만  명이다. 이것은 일본에 귀화한 15만 명, 조총련계 동포 약 10만을 제외한 수치다. 이들을 다 합치면 재일동포는 1백만 명이 넘는다. 한일회담이 진행될 때 한국대표는 재일동포에게 거주국에 빨리 귀화하여 안전한 생활을 도모하라고 권했다. 일종의 기민정책(棄民政策)이다. 일본 귀화는 일본에 굴복한다는 의미로 동포들은 받아들였다. 사업을 하려면 사업자금을 은행에서 얻기 위해 귀화해야 한다. 귀화한 사람 중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으로는 신격호, 손정의 씨등이 있다. 일본이 제 1차 세계대전의 호황으로 인력이 부족해 한국인을 공장직공으로 모집해 갔다. 돈을 번 사람 중 한국으로 돌아와도 뾰족한 수가 없어 장기 체류자들이 늘어났다. 

한국인 이주가 한창일 때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7.8도 지진으로 도쿄는 완전 폐허가 된다. 이 와중에 동경에 이상한 루머가 번져 나갔다. 한국인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뿌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에 방위대를 조직하고 한국인이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살해했는데 그 방법이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인이 3만 명쯤 된다. 관동대학살 사건 이후에도 한인들의 일본 이주는 계속된다. 전쟁 확산으로 일본은 한국인들을 차출해 가기 시작했다. 전선과 군수산업의 노동력으로, 23만 명이 군인, 14만 명이 군속으로 끌려갔고 20만 명의 처녀가 정신대로 끌려가고 혹은 길에서 잡혀갔다. 도합 64만 명이 전쟁에 동원됐다. 이 중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독립군이 있었고 일본을 위해 싸우는 한인이 있어 약소국의 서러움을 재삼 실감나게 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일본에는 약 2백만 명의 한인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귀국을 희망했으나 당시 선박 사정, 연합군의 불리한 귀국 조건으로 귀환 작업이 끝나는 1946년 12월 15일까지 귀국한 사람은 140만 명, 일본에 60만 명이 남아 재일동포가 됐다. 일본에 남은 한인들은 일본에게 빼앗겼던 한글을 배우고 조선인 연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 재 일본 조선인 연맹(조련)이 됐다.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좌경하게 되고 친 북한 세력이 된다. 이에 반해 재일 조선인 거류민단(민단)이 조직됐다. 이 두 조직의 대립에서 조련계가 여러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다. 

재일동포는 재산세등록, 외국인등록, 한신교육사건을 경험했다. 1946년 한인이 10만엔 이상의 재산을 신고하고 이것으로 세금을 정했다. 1947년 5월 일본 정부가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은 외국인등록을 하라고 했다. 이 등록은 지문 날인을 하고 매 3년마다 갱신을 해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괴로운 족쇄였다. 한인들은 반대했으나 매번 연합군 사령부의 설득으로 결국은 등록을 했다. 일본 정부는 1949년 교육법을 제정했다. 일본내의 모든 학교는 이에 준해서만 교육을 하라는 것이다. 한인들의 특수성을 고려해 줄 것을 탄원하고 한인 집중 거주지역 오사카와 고베에서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한신이란 오사카-고베의 약자를 합한 것이다. 수만명의 시위대에 일본인들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려 해산시켰다. 한신사건 1주년 때 한인 2만여 명의 시위가 일어나자 일본은 조련계를 불법단체로 지목하여 해산시켰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일본의 요시다 수상이 평화선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사이 북한의 남일 외무상이 ‘남일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의 동포는 모두 북한의 공민이고 북한은 이를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며 일본은 이들의 권익을 존중해 주라는 것이다. 그 후 북한은 막대한 교육자금을 일본에 보내온다. 조련계는 재일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그들은 일본 공산당의 지시는 거부하고 북한 노동당의 지시만 따르는 집단이 된다.

조총련의 첫 사업이 북송사업이다. 일본의 차별과 편견을 싫어하던 한인들이 북송을 자원했다. 1959년에 2,942명이 북한으로 갔다. 다음해 4만 9,036명, 그 다음해엔 2만 2,801명이 갔다. 이 후 숫자가 급격히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였다. 이 때 남한과 민단측은 반대 데모를 하며 적극 반대했다. 1965년에 한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한국 내 반대도 많았지만 재일동포들은 더 크게 반발했다. 동포들은 재일동포들에게 모금해도 충분한 5억불을 받고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는 일본이 요구한 대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민단이 북송을 반대한 것 이상으로 조총련은 한일조약을 결사 반대했다. 한일조약에 의해 재일동포들은 협정영주권을 받게됐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세광이 거주하는 오사카 이쿠노구에서는 민단과 조총련 간에 큰 충돌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정부는 민단원에게 50시간의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모국유학의 길을 넓혔으며, 재일동포의 모국 방문을 장려하고, 심지어는 조총련계의 한국방문까지 허락했다.

재일동포 박종석군은 아라이(新井)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벌기업인 히타치 취업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가 재일한인이란 것을 안 히타치는 그의 입사를 거부했다. 이것은 한인청년들이 당시 겪는 일이었다. 아라이군도 취업을 포기했다. 이것을 안 일본인 동급생들이 앞장을 서고 동포학생들이 합세해 “박군을 둘러싼 모임’을 결성했다. 재일대한기독교협회장인 이인하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요코하마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라이군은 자기의 본명 박종석을 회복하고 한인으로서 일본의 차별대우를 맞서는 투쟁을 시작한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호응해 ‘박군을 둘러싼 모임’이 전국적으로 확대 된다. 

이 사건을 알게된 동경고등재판소 나카히라 겐이치 판사는 판사직을 사퇴하고 박군의 주임변호사를 자청한다. 박군 사건이 한국에 전해지자 한국내에서 히타치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기독교 기관을 통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에서도 히타치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과 히타치는 굴복하고 말았다. 요코하마 재판소는 히타치 측에 박종석군을 채용하고 합격 발표일부터 3년간의 봉급을 지불하라고 지시했다. 1970-73년에 계속된 박종석 사건은 재일동포가 일본에 대해 이룬 첫 승리였다. ‘박종석을 둘러싼 모임’은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연락협의회(민투련)’로 발전적 해체를 했다. 박종석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총련과 민단은 침묵했다. 박종석군의 재판을 본 민단은 재빨리 변신해 권익투쟁에 합세했다. 

한상대(린필드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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