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웠던 여름도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어제 성당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데이지 아줌마를 본게 언제쯤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돼서 호도파이를 하나 사들고 헉스베리 강 건너 '데이지목장'을 찾아갔습니다. 빨간 함석지붕을 이고 있는, 동네사람들 말로는 200년은 충분히 넘었을거라는 목조다리를 건너자 건초더미가 군데군데 쌓여있는 목장지대가 나타납니다. 하워드 씨 허브농장 앞을 지날 때였어요.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풍차 옆으로 캥거루 두 마리가 나와 죽자사자 권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비가 와서인지 잠잠했던 개울물은 잉어와 뱀장어로 뒤숭숭합니다. 한결 두툼해진 목초지에는 얼룩박이 젖소가 정신없이 풀을 뜯고 지난 여름 자갈밭을 개간해서 만든 옥수수 밭쪽으로 물총새는 연신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저 청이,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은 추수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먹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지목장에 이르자 아쿠부라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아줌마가 나와 있더군요. 그녀가 휘파람을 길게 불어가며 수신호를 하자 렉스가 수십 마리나 되는 양떼를 몰아 산 허리를 타고 구름처럼 쏟아져 내려옵니다. 

"목축업은 쉬운 일이 아니야. 소떼를 몰아 풀이 풍성한 목초지로 데리고 나가야지. 갓 태어난 송아지에 표식을 하고 양털을 깎아 품질별로 분류해서 포대에 담지. 그런가 하면 업자들을 만나 거래 상담을 하고 육류시장의 동향을 인터넷에서 체크해야지. 가뭄에는 목초지에 풀들이 충분치 않아. 대신 목화씨와 옥수수, 건초를 준비해서 먹여야 해. 이러니 보통 새벽에 일어나 온종일 일하다 밤 11시에나 침대로 들어가는게 일상이야.”

메리노 양과 비육우를 사육하는 일은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다고 데이지 아줌마는 사륜 바이크에 앉아 말합니다. 양떼를 몰아온 렉스는 바이크 뒷좌석으로 가볍게 뛰어 오르더니 아줌마의 손등을 핥기 시작하네요. 데이지 아줌마는 두 아이의 엄마인 동시에 남편과 함께 570 헥타르나 되는 목장을 운영하지만 안타깝게도 척수마비 장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닥쳐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사고가 나기 전까지 아줌마의 생활은 피곤한 육체노동의 반복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꿈꿔 왔던 일이라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고. 그녀의 취미가 원래 정원 가꾸는거라 그저 아주 큰 정원에서 일을 하는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고...아줌마는 호주 목동들이 쓰는 아쿠부라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해가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휴가철에는 남편 조나단과 아웃백과 유럽, 이집트와 아프리카 등지로 캠핑여행을 다녔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다음 여행계획을 세울 정도로 그들은 삶을 즐겼다고 하네요. 그러나 5년 전이었어요. 사료창고에 쌓아놓은 500 킬로나 되는 건초 더미가 아줌마위로 굴러 떨어지면서 모든 것이 변한 겁니다. 사고 직후 응급실로 실려가 몇 차례의 수술과 집중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데이지 아줌마가 재활원에 머무는 동안에 헉스베리 농장에서는 달마다 어린 송아지가 태어났고 양털을 깎는 시기도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딸아이는 요리는 물론 세탁과 청소, 다리미질까지 해가면서도 중학과정을 마쳤다고 하네요. 또 철부지였던 아들도 아빠를 도와 물길을 내는가하면 쓰러진 말뚝과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남편의 일과까지 일일이 말해서 뭐 하겠어요. 힘든 목장일은 물론 아내의 빈자리까지 책임져야만 했으니까요. 데이지 아줌마로부터 이렇게 지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멜빵바지를 입은 주커만 씨가 코셔(Kosher. 유대인 율법에 의거해 도살하거나 가공한 음식)우유로 만들어 아주 신선하다는 샤베트를 들고 나오시네요. 주커만 씨는 데이지 아줌마의 부친 되세요.   

“청이야,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렴.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은 말이다. 엄마가 아기를 갖게 되면 아기를 찾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삶의 지혜와 무엇이 참된 용기인지를 들려주신다고 하는구나. 자상하게 아기의 양손을 붙잡고 말이지. 그렇게 말씀을 하신 후 집게손가락을 들어 아기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쉬”한 연후에 “이건 당분간 너와 나만이 아는 비밀로 하자.”고 덧붙이신다고 하는구나. 청이야,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코와 윗입술 사이에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잖니? 인중 말이다. 그게 바로 그 분과 우리가 한 약속의 흔적이란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차츰 그 분이 알려주신 삶의 지혜와 용기를 쉽게 잊어버리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낙담하기 십상이지. 하지만 그런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을수록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 깊고 깊은 ‘마음의 우물’에 고인 차갑고 냉철한 용기와 부드럽고 맑은 심성이 들려주는 소리에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데이지는 재활병원 침대에서 자신의 심연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그 분의 목소리를 길어올렸을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구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가족과 함께 호주로 오게 된 주커만 씨가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주커만 씨의 말대로 데이지 아줌마는 어느 날 자신감을 얻었지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장 일을 다시 시작하셨으니 말이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우선 밖으로 나가 간밤에 쓰러진 울타리가 있는지 폭우로 목초지가 유실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합니다. 여우나 딩고가 침입해서 어린 양들을 해치지는 않았는지도 살펴보고 목부들에게 워키토키로 그날의 작업지시를 한다네요. 그런 다음 부엌으로 돌아와 일꾼들을 위해 샌드위치와 커피도 마련한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아마도 데이지 아줌마가 인중에 남아 있는 지혜와 용기의 표징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실천하고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하고 저 청이 생각해봅니다. 

렉스가 컴컴한 마루 밑에서 몸을 사리고 있던 이구아나를 보고 귀가 따갑도록 짖어댑니다. 주커만 씨가 렉스의 목줄을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지난 가을에 따놓은 거라며 호두 한 자루를 가져가 먹으라고 들고 나오시네요. 저 청이, 정말 복은 타고났나 봐요. 호두파이 한판을 들고 와 한 자루나 되는 호두를 얻어가니 말이에요. 목장을 나오는데 조나단이 언덕 위에서 말뚝을 박다말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네요. 놋대야 같은 태양이 세상을 녹일 듯이 덤벼드는 쿠링가이의 늦여름입니다. 미치도록 뜨겁습니다.

박원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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