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번(본보 4월1일자 참조)과 마찬가지로 고국의 작은 매체에 실렸던 것을 일부 고친 것이며 사회 문제 해결 방안으로서 국민 행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같은 맥락입니다. 고국에 대한 비판적인 저의 시각이 맞는지를 고국의 매체 보도와 고국을 다녀오는 친지들의 논평을 가지고 항시 점검해봅니다. 이 글도 물론 그런 과정의 일부입니다. 

행태과학적 입장인 저는 고국의 사회 문제 해결은 결국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더 이상 물리적 탄압으로만 누르는 독재국가가 아니므로 선거 때마다 국민이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하는데 후보자는 거의 ‘같은 물에서 놀던 물고기’인 셈이 아닌가요. 그보다 선거 때와 선거 후 일관되게 지켜보고 같은 목소리를 내는 국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약간의 떡고물이면 금새 달라지는게 우리 민족이고 국민의 취약점이 아니던가요. 해외 교포들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필자 주(註)  


최근 어느 기고가가 한국의 매체에 ‘뻔뻔함과 무지스러움, 한국의 힘?’이란 제목의 칼럼을 써 “죄를 지어 감옥을 들락거린 재벌 오너들의 행태’가 사회적으로 용납된다는 사실에 대해 아연실색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범죄자들을 끔찍이 경멸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사회 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개탄하며 쓴 글입니다. 

이에 공감하는 나머지 맞장구를 치는 ‘독자의 편지’를 썼었습니다. 먼저 호주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재벌 총수인 알란 본드 사건입니다. 배임 수재로 기소되어 4년 실형을 복역하고 석방되어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77세인 지난해 심장병으로 숨졌습니다. 1983년 그가 재정 지원한 호주 요트팀이 아메리카컵 요트 레이스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본드대학 창설 등 다양한 사회적 기여를 해서 국민훈장도 받았지만 실형을 선고 받은 후 국민들의 정서는 싸늘해졌습니다.

한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바탕은 정의(正義)입니다. 흔히 저울에 비유되는 정의란 무엇입니까? 법치주의, 공정성, 형평성, 인성, 인격 등 우리가 윤리와 사회 기강을 말할 때 보통 쓰는 개념들이 모두 이와 오버랩됩니다. 

몇 년 전 외국인 학자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원서명 Justice)의 번역판이 한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한국인들도 정의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그에 대하여 얼마나 목말라 하는가를 잘 증명한 이변이었습니다.(실은 그 책의 내용은 제가 보건데 미국의 얘기이고 한국 사회의 정의의 실종이나 재활을 위한 어떤 대안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법치를 이미 언급했습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정의니 공정성이니 하는 말은 그저 수사이며 껍데기일 뿐입니다. 실형이든 형 집행유예든 범법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명예를 걱정해야 할텐데 배짱이 두둑한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실세 정치인이면 예외 없이 상대의 보복 또는 물타기라며 비호하는 세력이 있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본인도 당당합니다. 한 때 비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이번 선거에서 볼 수 있었듯이 대거 정당이나 국회에 보란 듯이 입성하는 기현상이 한국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돈과 이권으로 회유하면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는 기회주의 정치인,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그냥 쓰러져 버리는 국민들이 더 문제입니다. 망국병인 기회주의를 처벌하는 법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법이 별로 소용이 없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모두 과거 이야기라고요? 지난 9일자 조선일보는 ‘안하무인 재벌 2·3세들’을 꾸짖으며 재벌과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 아닙니까. 검사와 판사들의 신고된 재산 소유액이 50억, 100억 수준인데 그걸 보도한 기사는 사(士)자가 붙은 직업이라 처가를 잘 두어 그런 것 아닌가라고 토를 달았는데, 글세요. 
 
고국의 이런 현실을 오래 지켜보면서 저는 사회를 개혁하는 길은 거창한 구호나 정책이 아니고 비리를 미워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시민과 사회풍토를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명 ‘윤리적 행태 실천과 비실천의 방정식’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언론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pp.167-170 참조, 2001년 한울사간). 그 제안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아니 더 악화된 한국의 상황으로 봐 설득력을 갖는다고 봅니다.  

도식으로 될 일은 아니지만 올바른 행동의 실천을 위한 장기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통해 그 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육의 근본 원리는 100여 년 전 ‘조건 반사 이론’을 내놓은 러시아 심리학자 이반 파브로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익과 불이익 (reward and punishment)’의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방정식도 사람은 이익이 되면 실천(행동)하고, 불이익이 되면 실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이 때 이익은 물론 금전적 이득, 직위, 안위 등이고, 불이익은 금전적 손해, 실직, 고통 등 많습니다.

이런 중요한 분야에서 지행불일치(知行不一致)가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실천으로 옮기면  이익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간 한국의 여러 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방정식은 이런 풍토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하면 윤리적 행태가 이익이 되고 보상 받는 사회풍토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한 가지 모델인데 아래와 같습니다. 

개인 이익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유혹 (금전, 직위, 기타 이권)
(1)법의 제재 + (2)양심(심적 불편) 
+ (3)청렴에 대한 사회적 인정(명예) + (4)여론의 제재(남의 눈)

윤리적 행태에서 일탈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금전과 직위와 기타 이권 등의 이익들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유혹입니다. 이게 방정식의 분자입니다. 그 유혹에 대한 제어 장치 (deterrent)는 (1)법률상 제재 (2)양심 (3)청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명예 (4)여론의 제재, 네 가지입니다. 이들이 방정식의 분모입니다. 

방정식이 말해주는 것은 이렇습니다. 윤리적 행태의 일탈은 이익과 이권, 유혹의 크기에 정비례하고 유혹에 대한 제어 장치들의 강도에 반비례한다. 즉, 제어 장치의 실효성이 크면 클수록 일탈의 확률은 적어진다는 예측입니다. 분자의 경우 뇌물은 좋은 예입니다. 뇌물의 액수가 크다면 평소 청렴하던 사람도 말려들 수 있습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위 4가지의 제어 장치들을 점검해보겠습니다. 

첫째 법의 제재. 이건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이미 말한 셈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긴 정도입니다.  
둘째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는 평소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인간은 심한 내부 갈등, 즉 고뇌를 겪게 된다는 심리학 이론에 따르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의 말이 기억납니다. 살인범은 심적 괴로움을 못 이겨 나중에 반드시 자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옛날 옛적 이야기 같습니다. 요즘은 구체적 증거를 보여주고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도 그런 일 없다고들 부인하지 않습니까? 심장에 털이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셋째는 이권을 초월하는 정신적 보상이 있다면 그것도 큰 제어력이 된다는 가정입니다. 예컨대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그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명예를 얻게 되어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면 일탈은 줄어들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받는 사회적 또는 정신적 보상이 물질적 희생을 덮어주는 사회라면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첫째와 둘째 조건이 윤리적 행태를 권장하는 소극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녹록치 않습니다. 한국사회가 청렴한 사람을 오래 기억해주는 사회인가요?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 큰 돈을 번 재벌 총수가 아니라면 우리 국민은 금방 망각하고 맙니다.
하나 남은 마지막 희망은 여론의 제재입니다. 그건 서두에서 언급한 기고가의 말대로 범죄자들을 끔찍이 경멸하는 사회라야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범법자가 부끄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면 어디 감히 범법을 밥 먹듯 하겠습니까? 그 기능은 국민의 몫입니다. 국민은 다름 아닌 우리들 각자 개인입니다.

매사에 비관론을 펴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국민이 똑똑하고 진실해야 오늘의  난세를 해쳐나갈 수 있고 장래 서광이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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