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어디든 혼자 나서는 일엔 서툴러 무슨 대단한 결심인 양 떨립니다. 지난해 가을 다녀왔던 루라(Leura)가 생각났습니다. 기차표를 사기 전엔 혼자 갔다 와도 괜찮나 하는 망설임이 들었지만, 표를 받아드니 마음이 설렙니다. 기차를 타고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봅니다. 

시드니에서 기차로 2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루라는 가을 냄새가 물씬 합니다. 가을빛으로 단장한 거리엔 구경나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천천히 카페와 화랑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가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가게로 들어섭니다. 알록달록한 예쁜 카드, 편지지, 책갈피, 보들보들한 가죽 필통의 선명한 색깔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가게에 들어 설 때는 구경만 해야지 하던 생각과 달리 반짝거리는 크리스털이 박힌 볼펜을 만지작거리다가 값도 생각하지 않고 지갑을 엽니다. 펜을 사서 가방에 넣으니 맘이 뿌듯합니다. 글은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그게 어디 펜 탓은 아닐 텐데 이제 새록새록 솟는 생각들을 꺼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가게에서 나와 단풍나무 길로 들어섭니다. 사람들이 온통 카페 길에 몰려 있는지 단풍나무 길은 호젓합니다. 초록빛 잔디 위에 떨어진 빨간 단풍잎이 조화를 이루어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들을 열심히 쓸어내고 단정하게 치장을 한 집을 지나다가 한 장의 낙엽도 아까운 듯 쓸어내지 않고 수북하게 쌓아 둔 가을 속에 묻힌 집 앞에서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은 이 땅을 제대로 누리며 사는 법을 아는 듯합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쫓기듯 살아온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별천지로 느껴지는 풍경입니다.
나도 가만가만 낙엽을 밟으며 바사삭거리는 소리에 취해봅니다. 가을빛은 온통 루라에 쏟아져 내린 것만 같습니다.

블루마운틴 자락이 펼쳐지는 전망대 앞에서는 그저 ‘아!’ 하고 낮게 신음하듯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바라볼수록 가슴이 탁 트입니다. 까마득히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은 아찔하지만, 눈길을 거둘 수가 없어서 조심조심 다가가서 셔터를 누르는 손이 자꾸 떨립니다. 그제야 혼자 오지 말고 누구라도 채근해서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또 이런 상황이 오면 그냥 이 호젓함을 느끼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일에 빠져 지내느라 계절이 언제 오고 가는지 미처 느껴 볼 겨를도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갈증을 풀며 심호흡을 합니다. 

가을 구경에 빠져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카페가 있는 거리로 발길을 돌려 걷다보니 속이 허전합니다. 어딜 가서 뭘 먹을까 망설이다가 사람들 발길 따라 카페로 들어섭니다. 블루마운틴 숲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있습니다.  
오늘의 메뉴로 권하는 호박 수프를 말랑말랑한 빵과 함께 먹으니 쌀쌀한 날씨에 마음마저 녹여줍니다. 마음이 우울할 때 단맛이 위로가 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오늘 이렇게 서툴게 길을 나섰지만 얼마나 흐뭇한 시간이었나 생각을 하며 배시시 웃습니다. 

김미경(수필동인 캥거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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