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쿠링가이>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치폴로니 셰프는 어젯밤 늦게까지 축구경기를 보다 오늘 아침 지각을 하셨어요. 과음까지 하셨는지 출근하시자마자 홍차에 밀크를 잔뜩 넣어 마시면서 그게 자신의 해장법이라고 하시네요. 셰프는 9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이태리에서 이민 오셨어요. 당시 치폴로니가(家)는 총 밑천이었던 당나귀 한 마리와 소 두 마리를 팔아 가까스로 여섯 식구의 배삯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옴짝달싹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맨 밑바닥 선실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한 달 넘게 보냈는데 바로 뒤가 기관실이라 엄청 시끄러웠다고 그때를 회상하십니다.

“당시 이태리는 무척 형편이 어려웠어. 수십 호의 집들이 하루 종일 산그늘에 덮여 옹기종기 붙어있었던 것이 기억나. 겨울이면 2 미터가 넘게 눈이 쌓였고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던지 등지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지. 부모님은 올리브 농장에서 온 종일 일하고 우리 4 남매는 들판에서 이삭줍기를 해야 가까스로 살 수 있었지.”

한 달여 간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시드니 항에 도착했는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시드니만을 가로지르는 하버브릿지의 웅장한 모습과 그날 아침 살라미스 소시지를 원 없이 먹었던 거라고 하시네요. 

“그때까지 어머니는 우리형제들에게 아주 조금씩만 음식을 나눠주었는데 웬일인지 도착 날 아침엔 무척 후하시더구나. 신줏단지처럼 아껴오던 살라미스 소시지 보따리를 마침내 푸신 거야. 부두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갑판 위에 온 식구가 빙 둘러앉아서 소시지를 먹었던 기억이 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가 그 날 아침에야 비로소 호주 검역소에서 일체의 음식물 반입을 금한다는 소리를 들으셨던 모양이야. 아무래도 소시지를 죄다 뺏길 거 같으니까 자식들에게나 실컷 먹이자는 생각을 하셨던 거지.”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셰프는 오늘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포테이토 피자를 만들어 볼거라며 에이프런을 두르고 뒷마당으로 나가시네요. 셰프는 창고에서 감자 자루를 꺼내와 잔디밭에 풀어놓고 털썩 주저앉으십니다. 햇볕이 포근하게 내려앉는 뒷마당은 허드렛일을 하기에 참 좋아요. 이따금 뒷집에 사시는 토니 할아버지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어 말참견을 하시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희 사장님은 “이것도 접대다 생각하고 꾹 참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고 하세요. 토니 할아버지가 가끔 할머니 모시고 애플파이 드시러 저희 카페를 찾아주시거든요. 

저 청이, 잔디밭에서 감자를 까고 계신 셰프를 도우려고 팔을 걷고 다가갔더니 이건 지각한 벌로 자기 혼자 할 일이라며 그냥 앉아서 얘기나 듣고 있으라고 하시네요. 하긴 지금 시간은 자외선이 강한 때라 양지에서 일하는 거는 피해야죠. 대신 수돗가 그늘에서 셰프가 까놓은 감자를 씻어가며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 청이, 피부관리에 한창 신경 써야 하는 열아홉 살이거든요. 양 마담이 틀어놓았는지 안에서 제니퍼 로페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셰프는 흙이 더덕더덕 붙은 감자를 들고 하시던 말씀을 계속 하십니다.

“유럽인들이 호주로 이민 오게 된 배경에도 이 감자가 큰 몫을 했단다. 19세기 중엽 마름병으로 감자수확이 현저하게 줄자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콜레라 같은 전염병도 퍼지기 시작했지. 이 끔찍한 재앙으로 백만 명에 가까운 아일랜드인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 나갔단다.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들어 미국으로 혹은 호주로 오게 된 거란다. 연이어 이탈리아, 그리스로부터도 이민자들이 호주로 들어오고. 먼저 와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과 후에 이민 오는 사람들 사이에 인종차별 같은 갈등이 생기게 된단다.”    

셰프도 어린 시절 차별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고 하네요. 왜 이태리음식은 냄새가 심한가부터 시작해서 잔디밭을 없애고 채소나 토마토를 심는 것을 못마땅해 했으면 뒤뜰에 오리나 닭을 키운다고 트집 잡았고 주말에는 패밀리가 모여 노래 부르고 큰 소리로 떠든다고 이웃에서 항의를 해왔다고 합니다. 

“나는 영어를 못해 많이 얻어맞았지. 근데 자꾸 밀리니까 안 되겠더라. 나중에는 참지 않고 두들겨 패주었지. 덩치도 컸던 대다 어렸을 때부터 산을 오르내리며 일해서 힘도 셌거든. 그러니 내 힘을 이겨낼 수 있겠어? 차차 아이들이 나를 따르더구나. 처음에는 기분이 좋더라구.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인격에 대한 존경이 아니었어. 힘의 불균형에서 나온 아첨과 복종이었지. 그래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어.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면 생각을 전할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자꾸 싸우게 되니까.” 

“나눠서 정복하라(Divide and conquer)” 라는 시이저의 말대로 셰프는 그때부터 모든 걸 한 번에 얻으려고 무작정 주먹 쥐고 덤벼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영어를 배워 친구와 대화를 시작했고 그 친구가 그토록 싫어하던 살라미스 소시지도 나눠 먹을 정도로 친해졌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맥콰리 대학에 들어가 해양생물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몇 군데 직장을 거쳐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같은 교회를 다니던 카타리나를 만나 결혼했다면서 자신의 삶도 징검다리 건너듯 하나씩 하나씩 밟아온 거라고 하시네요. 저 청이 에이프런 앞주머니에서 꼬마수첩을 꺼내 “나눠서 정복하라”와 “징검다리 건너듯 하나 하나씩 디디며 가자”를 적어둡니다.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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