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말 노스 쇼어 상부에 있는 집을 보러 갔을 때, 뒷마당 층계 밑 개집에 묶여있는 개를 보았다. 빈 집에서 슬픈 눈빛으로 끙끙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사할 곳을 여러 군데 알아 보았지만 마땅한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킨더가든에 입학한 손자가 있어 학교가 가까워야 했기에 시간만 흘렀다.
그후 한 번 더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집 딸이 집에 있었다. 나는 그 날도 묶여있는 개를 보았다. 그녀는 집이 팔리면 이사 갈 아파트도 있고 개는 친척집에 간다고 했다.
인연이 되느라 그랬는지, 학교에 더 가까운 다른 집을 검사했지만 결과가 안좋게 나와 개가 있던 집으로 결정을 하고 계약을 했다.

얼마 후 개를 맡아 줄 수 있느냐는 에이전트의 이메일을 받고 나는 고심에 빠졌다. 나는 집 안에 사는 반려견 두 마리를 데리고 가야 하는 처지에 마당에 사는 개를 맡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는 노령에 접어들었고, 크고 작은 짙은 갈색 털이 흰색 바탕에 박혀있는 ‘잭 러셀 테리어’였다. 영리하고 뒷마당을 잘 지켜 쥐나 포섬이 드나들지 못한다고 여주인이 열을 올렸다. 큰 개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걱정을 하자, 그녀는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개에게 스킨십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닌가. 주인의 손을 놓친 가여운 유기견에 동정이 가던 나는 그만 승낙을 하고 말았다. 뒷뜰에서 십 년을 살아 그 집에 익숙한 개를 믿으며, 나는 28년 동안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동네에 살아야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수쿠비’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고집이 있는 편이지만,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고 컸는지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순했다. 예방접종 증서를 요구했더니, 얼른 추가 접종을 하고 개에 대한 서류를 주는 바람에 나는 얼결에 새 주인이 되었고 카운슬에 주인 변경 신고를 했다.

내가 뒷마당에 내려 갈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주인을 떠나 보낸 마음을 위로했더니 개는 나를 따르고, 아침마다  이층 베란다에 나오는 나를 보러 목을 빼고 위를 올려다 보곤했다. 그것도 나의 반려견 ‘리치’가 샘을 내어 짖고 난리를 떠는 바람에 내가 이 집에 있다고 안심을 시키는 정도였다. 먼저 주인이 개를 두고 떠난 날 우리가 이사오자, 좀처럼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개가 이층으로 확인을 하러 올라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나는 오십견이 생겨 수쿠비의 목욕이 걱정되었다. 한번은 먼저 주인이 와서 목욕을 시켜주고 갔다. 개는 주인을 다시 만났지만 반가운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슬프고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이 의젓했다. 개집을 수영장 층계 밑에서 수쿠비가 좋아한다는 세탁실 옆, 나무 천장이 있는 넓은 공간으로 옮기고, 추울 때는 세탁실에서 지내게 했다. 

가끔 밤에도 고집스레 짖기도 해서 난처했지만 그럴 때는 다 이유가 있다고 먼저 주인이 알려주었다. 이 동네 특성상 포섬이나 토끼가 근처에 나타났다던가 옆집 고양이가 담위를 살살 돌아다닐 때는 난리를 쳤다. 
 
내가 맡아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수쿠비의 주인은 ‘휴’하고 마음을 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얼른 내가 개의 주인이라고 다짐을 주었다. 새끼 때부터 키우던 개를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전 주인의 아픈 마음이 느껴졌다.

수쿠비는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아했다. 잔디를 깎으러, 수영장 검사를 위해 고정적으로 뒷마당에 오는 사람을 위해 수쿠비를 묶어두어도 꾹 참고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성견은 하루에 한 번 사료를 주라고 했지만 나는 아침 저녁으로 먹이 그릇이 비면 채우고 했다. 사료가 마음에 안들면 엎어놓기도 해서 메뉴를 바꾸기도 했다. 수쿠비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생겼지만 건강했고 행동도 날렵했다. 농구공을 굴리는 운동을 좋아해서 내가 발로 공을 차주면 뛰어가서 요리조리 몰아가며 즐겼다.
큰 개를 목욕시키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었다. 큰 통에다 더운 물을 담고 예비 통에도 물을 채우고, 수쿠비를 묶은 채 샴푸로 문질렀다. 헹군 후 내가 잠깐 방심하면 얼른 옆의 개 집에 올려놓은 타월을 물고 왔다. 몸을 닦고 줄을 풀어주면 잔디에 달려가 딩굴며 젖은 털을 말렸다. 목욕 중에도 “다리 들어!” 하면 알아 듣고 들어주었다.  

마당에 사는 개는 발톱을 깎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내가 아침에 먹을 것을 주러 갈 때, 좋다고 달려들면 발톱이 아프게 느껴져 피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수쿠비는 표정이 슬픈 인상이었지만 새끼 때에는 귀엽지 않았을까. 

2015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저녁 무렵, 수쿠비가 야단스레 짖어 내려가 보니 낮은 나무에 포섬이 앉아 있었다. 내가 빗자루로 나무를 치니 도망가는 포섬을 수쿠비는 쏜살같이 달려가 제압했다.  포섬을 죽여 땅을 파고 묻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꺼내 흔드는 것을 보고 내가 나섰다. 수쿠비를 묶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없어 안심했다. 21일 오후에 개 집 옆, 좁은 공간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 앉아 있는 수쿠비를 보았을 때는 나는 울고만 싶었다. 
다리를 쓰지 못해 오줌이 배에 젖어 있어 다음날 일찍 병원에 데리고 갔다.  전날 내가 세탁실에 갔을 때도 개집에서 자다가 일어나 나를 반겨주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건만…  

수의사는 우리 동네의 특성상 ‘틱’이라고 했다. 그냥 두면 내일 쯤 죽을 것 같고 전문병원에 가서 2주 정도 입원해도 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나는 수쿠비의 뺨에 키스를 연달아 하며 안정제 주사를 맞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불길한 순간에도 수쿠비는 내게 꼬리를 쳤다. 20분 후 수쿠비의 기분이 좋아지길 기다려 안락사 주사를 맞혔다. 수쿠비의 심장이 뛰지 않는데도 눈을 감지 못해 수의사가 쓸어내렸다. 비닐 자루에 넣는데 수쿠비의 귀가 자루 끝에 걸렸다. 마음 속에서 후회의 불길이 일었다. 

포섬으로부터 틱이 옮을 수 있다는 수의사의 말에 방심했던 나의 불찰을 후회했다. 목욕을 끝낸 후는 틱약을 계속  발랐주었고, 3주 전에도 발라주었지만 효과가 2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심했었다. 이제 내가 이 집에 적응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해서 수쿠비가 나를 떠난 것인가.  
크리스마스가 며칠 안 남은 2015년 12월 22일 수쿠비는 나를 떠났다. 13살을 넘겼으니 수명을 거의 다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나는 자책감으로 괴롭다. 

수쿠비와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했던 전주인의 말이 야속했다. 먹이를 주러 마당에 내려가거나 수영장 기계실에 들어갈 때 수쿠비는 익숙하다는 듯 나를 따라 다녔다. 머리를 쓰다듬고 목욕을 시키고, 수쿠비의 서늘한 눈빛을 보며 나는 깊은 교감을 했을까. 
길들인다는 것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는데…
내가 만약 틱 전문 병원에 수쿠비를 데려갔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수쿠비가 나이가 많아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만, 나는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수쿠비의 텅빈 집을 볼 때마다 흔들린다. 스킨십을 하지 않고 개를 기른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전옥경(글무늬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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