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망가진 노년
탈무드에는 홍수 이후 노아의 행태를 재해석하며 풍자하고 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다. 그때 사탄이 찾아와서 말을 걸었다. 
사탄 : “노아 할아버지, 지금 뭘 하십니까?”
노아 : “포도나무를 심고 있다네.”
사탄 : “포도나무요? 포도나무가 어떤 나무지요?”
노아 : “아, 포도나무는 아주 맛이 달고 좋은 과일이네. 적당하게 신맛도 나고, 이걸 발효시키면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술이 되기도 하네.”
사탄 : “그렇게  좋은 나무를 심는 중이라면 저도 도와드리지요.”
힘들게 밭을 갈고 포도나무를 심고 있던 노아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사탄을 상당히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사탄이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 그랬더니 사탄은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를 턱하고 잡아 오더니 이 짐승들의 피를 줄줄 짜서 거름에 섞어 비료로 사용하며 포도나무를 질서정연하게 잘 심어주고는 갔다. 
그 여름에 날씨도 좋아서 아주 탐스럽게 포도가 열렸다. 신이 난 노아는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담갔다. 세상에 둘도 없는 기막힌 포도주 맛이 났다. 노아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셨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아가 포도주를 처음 조금 마셨을 때는 양처럼 순해지고, 조금 더 마셨더니 사자처럼 강해지고, 조금 더 마셨더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제법 많이 마셨더니 원숭이처럼 떠들고 다녔다.     

술은 이처럼 아주 선하고 경건한 사람까지도 이상하게 변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필자의 중학교 시절, 바로 옆집에 점잖은 교사가 살았다. 그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 때마다 집에 들어서면 기막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인을 딱 불러 세워 제식훈련을 시켰다. 
“차리어!” “열중 쉬어!”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앞으로 가!” “앉아 일어서!” 
놀랍게도 부인은 이 구령에 맞추어, 훈련병처럼, 순한 양처럼 아무리 짧아도 한 시간이나 되는 그 제식훈련(?)을 군소리 없이 다 받았다. 왜냐고? 그 구령대로 안하거나 못하면 집에 보이는 모든 물건은 몽둥이로 변해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매질을 해대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술을 깨면 남편은 술 취해서 무엇을 했는지 까마득하게 몰랐다. 소위 중간에 필름이 끊긴 것이다. 그 점잖은 교사도 술만 취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필자가 상담학을 공부한 이후 그의 군대시절 트라우마가 무척 궁금해졌지만, 교감까지 승진한 그는 나중에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별세했다).  

추락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노아나 그 교사를 보면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노아가 누구인가? 성경에서 당대에 가장 경건하다고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예외 인력’이 된 사람이다. 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될 만큼 훌륭한 그가 술 때문에 힘없이 무너졌다. 나쁜 버릇은 세 살 적 것이 여든까지 가지만, 좋은 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초창기 경건이 평생은커녕 아예 버릇조차 들기 어렵다. 

마라톤 경기에서 아무리 초반전에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 미터를 앞서 달렸어도, 결승전 바로 앞에서 쓰러졌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 통과한 다음 맨 나중에 결승전에 도착했다면 몇 등인가? 초반전에 일등으로 달렸다고 좀 가산점수를 주는가? 결국 결승전에서 꼴찌였다면 꼴찌다. 이제까지 잘 달렸다고 안타까워하거나 동정의 여지는 있겠지만, 역시 변함없는 꼴찌다. 인생 마라톤에서 노아가 거둔 성적이 꼭 이렇다.
               
사람이 추락하고 무너지는 것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나 사고보다 아주 사소한 데서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 결과는 얼마나 쓰라렸는가? 얼마나 큰 추태였는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자다 자식들에게 들켰다. 필자는 아직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식들 보는 앞에서 벌거벗고 자는 사람 이야기는 노아 외엔 들어보지 못했다. 
노아에게  술은 정신을 빼어가는 독약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 전쟁, 흉년, 전염병, 이 세 가지가 주는 피해를 합한 것도 술로 입게 되는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아, 술이여! 네게 만일 적당한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너를 악마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했다. 술잔과 입술 사이에는 파괴적인 실수가 늘 숨어 있다. 이 술은 영적인 거장, 노아를 타락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양심은 인간을 짐승 이상으로 만들지만, 술은 인간을 짐승 이하로 만든다”고 한다. 

발달장애, 성인 아이 아들
수학이나 과학에서는 공식이 참 중요하다. 아무리 쉬운 문제도 공식을 무시하면 풀지 못한다. 반면에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공식을 잘 응용하면 쉽게 풀린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부딪히는 각종 문제들을 푸는 데도 기본 공식이 있다. 흔히 ‘상식’ ‘도덕’ ‘예절’ ‘관습'이란 말로, 대부분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공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삶의 공식은 속담과 격언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가정불화는 파산의 근본이다”(나폴레옹). “집은 손으로 짓고, 가정은 정으로 짓는다.” “결혼은 쉽고 가정은 어렵다.” “교회는 설교하고, 학교는 가르치고, 가정은 듣고 배운 것을 소화하는 곳이다.” 
얼마나 멋있는 말들인가? 이런 공식은  사회와 공동체를 세워가는 척추와 같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어디에나 잘 듣는 만병통치약처럼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의 문제, 가정의 문제는 이런 공식이 무색할 정도로 예측불가능한 것이 많다. 흔히 좋은 부모,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성장하면 걸출하고, 탁월한 인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공식’도 상당히 빈번하게 오류가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노아 가정의 둘째 아들, 함을 보라. 그는 완벽한 신앙의 가정에서, 당대에 가장 유명한 설교가요, 모범적인 아버지로부터 훌륭한 설교와 교훈을 듣고, 예배하며 자라난 아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세기 9:22)    
여기에서 ‘보고’는 원어로는 그냥 단순히 보았다는 말이 아니다. ‘재미있게 응시했다’, ‘주목했다’는 강한 의미가 있다. 호기심을 갖고 뚫어지게 보았다는 말이다. ‘고하매’ 역시 그냥 단순히 말했다는 뜻이 아니다. ‘기쁘게 말했다’는 뜻이다. 즉 벌거벗은 아비의 하체를 아주 뚫어지게 주목해 보고는, 바깥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자기가 보고 관찰한 아비의 모습을 형제들에게 깔깔거리며 전해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함의 모습에서 철부지 어린아이가 방정스럽게 입을 놀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노아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준 것은 백번 잘못이다. 그러나 그 아비의 그런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관찰한 것에 첫 문제가 시작된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루터의 말처럼 우리 주변에는 항상 죄를 짓게 할만한 사안과 환경들이 날아다닌다. 그 사안, 환경들을 붙잡아 마음속에 ‘금지된 생각’을 묵상하며 즐거워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이미 죄가 그 마음 안에서 똬리를 틀기마련이다. 함이 바로 대표적인 경험을 했다. 아비의 하체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부터 죄악이 마음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둥지를 틀었다. 

그러고 보니 입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발견한 이 사실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요란스럽게 밖에 나가 알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방 밖을 뛰어 나오니 마침 셈과 야벳, 두 형제가 있었다.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내용을 알려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스릴이 넘쳤는지 신나게 지껄였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흉노파’였다. 흉노파라고? ‘흉보며, 노닥거리며, 파당을 짓는 사람’이다.   
“셈, 야벳, 내 말 좀 들어봐.” “무슨 일인데?”
“글쎄 지금 아버지 꼴이 말이 아니야! 과연 포도주의 위력은 대단해! 글쎄 그 포도주는 우리 아버지로 하여금 바지를 벗게 하잖아!”    
앞서 인용한 성경구절에서 또 주목해보아야 할 말이 있다. 바로 “가나안의 아비”이다. 그러니까 함은 아비의 생식기를 보고,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며, 난리를 칠 정도로 어린 아이가 아니다. 아이를 넷이나 둔 어른이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완전히 어린아이처럼 얼마나 유치한가? ‘발달장애자’의 전형이다.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모는 어른이었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 어린 아이다. 즉 ‘성인 아이’이다.  
  
‘왕따’ 시키는 두 아들
함은 자기가 알려주는 이야기가 두 형제의 호기심을 발동하며 집안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어린아이 같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함이 전해주는 이 말에 전후 상황을 눈치 보던 셈과 야벳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이서 아버지의 겉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가며 아비의 부끄러운 부분을 보지 않고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여기서 이 삼형제의 미묘한 관계를 읽히지 않는가? 

셈과 야벳은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술주정을 익히 알아 서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함의 ‘보고’를 듣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버지의 옷을 찾아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들어가 덮어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 두 형제는 정말 죽이 잘 맞았다. 
두 형제는 그 ‘엄청난 보고’를 하는 형제 함에게 따뜻한 충고 한 마디 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함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드리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도리요, 효도이다. 반면에 앞에서 멋쩍게 서있는 형제 함을 바보로 만들거나 ‘왕따’시키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평소 셈과 야벳 두 형제는 ‘성인 아이’로 항상 엉뚱한 말만 해대는 함을 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두 형제는 자연히 함을 왕따 시키고, 함은 더 두 형제의 주목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처럼 보이지 않는가? 함의 입장에서는 조금만 신기한 것을 보아도 즉각 두 형제에게 알려주며 그도 두 형제 사이에 끼어들고, 대화하며, 교제하고, 형제애를 나누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가? 
함이 이처럼 결정적인 패륜행위를 저지른 데에는 부모와 형제가 그를 은근슬쩍 소외시킨 데에 있다. 그러니 가족들 모두가 공범자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소외와 왕따가 얼마나 큰 죄를 불러오는지 잘 보아야 한다.   
    
아비의 저주
성인아이, 함의 행위는 당연히 아비의 분노를 샀다. 아비는 그러한 아들에 대하여 참지 못했다. 당사자 아들이 아닌, 사랑하는 손자를 저주하는 노아의 분노는 알만하지 않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세기 9:25) 
“종들의 종!” -사랑하는 손자에게 이처럼 가장 비천하고 비열한, 가장 천한 종이 된다는 예언적인 저주를 하지 않는가? 함이 지은 ‘순간의 범죄’가 이처럼 가문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사람의 순간적인 죄가 이처럼 자자손손 영향을 미치고, 처참한 운명으로 몰아넣었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이토록 심하게 아들을 저주하는 아비가 어디 있는가? 그 아들의 그 행동에 원인 제공을 한 자신을 돌아보며, 신에게 영혼을 쥐어짜는 회개가 있어야 했다. 

송기태(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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