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학자와 호주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자신이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의 출신이 어디었을 것 같은가? 뉴질랜드 출신의 백인이었다. 억양이 그렇게 불편했을까? 물론 그의 인종차별 경험은, 아주 미묘한 수준이어서 시비를 가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비호적인 사고 방식과 배경으로 인해 암암리에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대화 속에서 공감은 되면서도, 이 사람이 과연 우리 같은 비백인, 비영어권 출신들이 매일 경험하는 차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실제로 호주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나라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현실은 다양한 형태로 흔하게 경험된다. 지나가는 차속에서 빵빵거리며 “아시안 고우 홈!”을 외치는 시골의 십대나, “중국인이 너무 많아 호주가 이상해졌다”며 화를 내는 백인 노인만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다. 

은근히 “황인종들은 원래 잡일이나 해”란 표정으로 얌체같이 일거리를 맞기고 도망가는 동료나, “너는 우리 쪽 분위기를 잘 몰라”라는 눈길로 나보다 덜 성실한 백인 동료를 승진시키는 보스에게서도 인종차별이 의심된다. 지극히 ‘반차별적인’ 합법적 절차 속에서도 반드시 끼게되는 주관적 판단 속에서 인종차별의 의심을 살만한 일들은 수없이 벌어진다. 

그것을 더 많은 학위와 노력으로 메꾸려고 할수록, 또 그 틈을 비집고 성공한 미담들을 뉴스가 떠들어 댈수록,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더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어떤 경우든 대부분 인종차별의 현실은 객관적인 능력이나 시시비비가 아니라, 내가 가진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특징을 이유로 차별을 가하는 모든 상황에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현재의 상당한 수준의 반차별법 제재와 법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그런 짓이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 말대로 누구나 ‘자기가 편한 사람’과 더 말하고, 더 일하고, 더 놀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도 있다. 호주도 ‘섬나라’인만큼 전형적인 폐쇄성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소소한 인종차별 사례와 다 싸울 만큼 열정적인 사람도 많지 않다. 어쨌든 참는 게 쉬워 보인다.

그러나 이건 내 문제에서 끝날 일은 아니다. 다음은 세미나에서 만난 2세 청년의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내가 호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회사에 가니 나를 다르게 취급했다. 아니 다르다고 강요당한 것 같았다.” 
한 2세 전문직 종사자은 “직장에서 승진할수록 호주인들간의 네트워크의 장벽이 너무 컸다. 남아있어도 이용만 당하는 것 같아, 결국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친구들이 결국 다시 한국어를 배워가며 한국과 한국 사회 주변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문화국가 호주’라는 이미지가 바래져 보인다.

결국 강력한 모국의 힘을 더 동원할 방법을 찾아 우리의 자존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태인들처럼 끼리만 똘똘 뭉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쪽이라면 무자비하게 싸워야 하나? 혹은 이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털기 위해 ‘대화’하고 교류하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때인가? 

현재를 둘러보면 이중 뭐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과 유럽 할 것 없이 경기가 나빠지는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가 커져가는 극우 인종차별주의가 남의 일 같지는 않다. 천진난만하게 영어로 깔깔거리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