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쿠링가이에 들르면 롱블랙 Long Black 커피만 찾는 봅 리건은 맥콰리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는 30대 후반의 미혼남입니다. 봅은 쿠링가이에서도 후미진 그러니까 헉스베리 강을 따라 한참 올라간 산골에서 골든리트리버 한 마리 데리고 느긋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 그가 최근에 4년 동안 월급을 모아 호주에서도 4천 킬로나 떨어진 남극대륙을 돌아보고 왔다고 합니다. 일상을 훌훌 털어버린 27일간의 기나긴 휴가였지요. 그가 탔던 남극 유람선은 러시아 국적의 캐피탄 클레브니코프 호(號)였다네요. 남극대륙 여행만을 전문으로 하는 선박으로 영하 50도에서도 운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해요. 10층 높이 맨 꼭대기에는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있었지만 그 큰 배도 파도가 칠 때는 객실선반 위에 놓인 물건이 죄다 떨어질 정도로 마구 흔들린다고 합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다보면 많은 아시아 유학생들이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들 중 일부는 대학에 남기도 하고 또 일부는 마이크로소프트사 같은 좋은 회사에 취직이 되기도 하고 나머지는 학위 취득 후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처럼 전공서적을 들춰가며 거기에 코를 박고 공부하기 보다는 이 책 저 책 그냥 맘에 드는 것을 적당히 골라 꾸벅꾸벅 졸아가며 읽습니다.”

봅은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을 사고 고급 승용차에 눈을 주기 보다는 성능 좋은 망원경을 사서 쿠링가이의 밤하늘을 관찰하고 지구본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는 상상여행을 좋아합니다. 또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적 보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들여다보며 아마존 여행 같은 오지탐험을 실질적으로 계획합니다. 어쩌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똑똑한 선두주자가 되는 걸 일치감치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증거로 자신은 얼음을 가르는 쇄빙선이 될 수 없다고 말하네요.  

“남빙양을 여행하다보면 커다란 빙산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경우 쇄빙선이 먼저 얼음을 가르며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 쪼개진 유빙들 사이로 작은 배들이 통과하기 시작해요. 저처럼 '이지 고잉 Easy Going '하는 거지요. 남극에 가까워지면서 선박 앞을 가로막는 어마어마하게 큰 빙산이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그때마다 탄성을 질러대요. 너무 순백이다 보니 도리어 푸른 빛깔을 띤 것처럼 보이는 설산들이 나타났다 뒤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대자연의 위대함에 우리의 하루하루 삶은 하찮게 여겨집니다. 망망한 설원에서 노을빛을 본 게 두어 시간 전인데 여명으로 다시 새 날을 시작하는 백야를 경험한 후 낮과 밤이 반반으로 나뉜 세상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된가도 생각하게 되었고요. 이번 남극여행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난당한 이들을 위해 빨간 토마토 모양으로 만든 피신처였는데 언젠가는 그게 누군가의 귀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특별하게 여겨졌어요.”

새미르가 빌려 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에는 <사과나무가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장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요. 소로우는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대요. 하버드대학을 졸업했지만 부와 명성을 좇는 화려한 생활을 따르지 않고 고향인 콩코드로 돌아와 자연 속에 파묻혀 소박하게 살았다고 하네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옥수수와 감자를 거두어들이고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식량을  마련했습니다. 서리가 내리고 호수가 얼 징조를 보이면 땔감을 구해오고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며 맘껏 사색하거나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전해져옵니다. 

봅 역시 일터인 도서관에서 일찍 퇴근하거나 쉬는 날이면 뗏목을 타고 헉스베리 강을 오르내리며 고기를 잡고 근처 목장에서 소똥을 얻어다 채소를 재배하는가하면 직접 닭을 키워 달걀을 식탁에 올린다고 하네요. 그럼 면에서 봅은 사람들과 피 튀기게 경쟁하며 인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지 고잉>을 실천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이지 고잉>은 <톨 포피 신드롬, Tall Poppy Syndrome>과 함께 호주인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톨 포피 신드롬>을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키 큰 양귀비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리에서 불쑥 자라 오른 키가 큰 양귀비는 호주사회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솎아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체 양귀비를 위해 키 큰 양귀비는 희생되어야하며 조화와 균형이 개인의 능력에 우선한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지 고잉>과 <톨 포피 신드롬> 때문에 호주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물론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해요. 그럼에도 저 청이는 호주인들이 지닌 <이지 고잉>과 <톨 포피 신드롬>을 지나친 경쟁 속에서 벗어나 평균성이나 공평성에 더 가치를 두고 고루 잘 살아가자는 의미라고도 해석해봤어요.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행복을 찾아보자는 뜻으로 말입니다. 

빛이 어둠에 녹아드는 평화로운 시간이에요. <카페, 쿠링가이>의 가스등을 꺼주어야겠어요.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워니 사장님, 자꾸 희죽거리며 웃으시는 걸 보니 또 꿈속에서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나셨나 봐요. 그러고 보니 인생의 달콤함은 사장님처럼 꿈속에서도 맛볼 수 있는 거네요.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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