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부활절만 되면 시드니 올림픽 공원에서는 <이스터 쇼>라는 큰 잔치를 2주간에 걸쳐 펼친답니다. 100년 전부터 시작된 이 전통 깊은 행사는 처음에는 농산물과 축산물의 생산을 장려하고 품종개량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네요. 부활절만 되면 농민들은 한 해 동안 키운 가축과 수확한 농산물을 트럭에 싣고 시드니로 몰려와 경연대회를 열었어요. 지금은 먹거리 시장과 롤러코스트 같은 놀이시설도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점점 놀이문화로 굳어지는 느낌이 든답니다. 그럼에도 그날이 그날 같아 몹시 심심해하는 시드니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로도 아주 신나는 구경거리라 많은 사람들이 <이스터 쇼>를 보러 우르르 몰려가네요. 부활절 방학에 들어간 새미르가 저보고도 함께 가자고했지만 몇 번 가 본 저로서는 사람들만 법석대고 재미도 없어 거절 했어요. 그리고 남자 말에 너무 잘 따라주면 쉽게 볼 거 같아 튕겨본 면도 있고요. “여자와 캥거루는 튀는 방향을 모른다”는 호주 속담처럼 남자의 기대나 예측을 이따금 빗겨 갈 필요가 있거든요. 주방에서 와인 오프너와 글라스를 찾아 들고 뒷마당으로 오니 사장님은 고향인 평택에서 일어났던 할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계시네요.  

“자식들 중 어느 누구도 밖에서 오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저런 경칠 놈’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어. 오줌은 반드시 대문 옆에 마련된 버캐가 더께로 앉은 오줌항아리에 대고 누워야 했지. 오줌은 채소를 가꾸는 소중한 거름이었거든. 누구든 오줌 가득한 배를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걸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밖에서 누면 안 되는 거였지. 그게 당시의 집안 법률이었어. 기차를 타고 다른 데를 다녀오실 때는 대부분 무임승차했다고 전해지지. 앞 칸에서 검표원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일어나서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곰방대를 꺼내 거기에 연초잎을 쑤셔 넣었지. 그러다가 검표원이 다가오면 그 곰방대를 기차 천장에 대롱대롱 달린 알전구에 대고 열심히 빨아대며 불을 붙이는 시늉을 했다는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본 검표원은 혀를 끌끌 찬 후 관자놀이쯤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할아버지를 지나쳐 가버렸다고 하네.”

검표원은 객실에 켜진 조명용 전등에다 대고 담뱃불을 붙이는 할아버지가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세상물정에 무척 어둔 사람으로 보고 승차권 확인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소리 같아요. 그럼에도 저 청이, 사장님 말씀 중에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경칠 놈이니 버캐니 또 오줌항아리니 곰방대니 하는 단어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마다 말을 끊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배 사장님이나 양 마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 있어 모두 이해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잖아. 목적지에서 내린 후 역사를 빠져나가는 일이 남아 있지 않겠어. 그런 경우 할아버지는 될 수 있는 대로 느리적 거리며 기차에서 내린 다른 승객들과 상당한 시간과 공간적 거리를 두고 걸었다고 하네. 그러다 거의 모든 승객이 역사를 빠져나갔다 싶으면 갑자기 행동이 빨라지는 거야. 방금 전에 할아버지를 내려 준 기차가 쉬잇쉬잇 허연 연기를 바퀴 밑으로 뿜어내며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 그것을 따라 잡을 기세로 철로 변 자갈들을 요란하게 뒤로 차며 기차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지. <멈춰! 멈춰! 서란 말이다. 이놈의 기차야> 숨차게 외치는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플랫폼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면 어김없이 삿대질하며 달려오는 역무원의 고함소리도 들려왔어. <거기 비켜. 저놈의 늙은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어서 이리 나와> 그런데 이 <어서 이리 나와>라는 소리는 할아버지가 애타게 기다리던 말이었어.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전혀 반가운 기색을 짓지 않고 오히려 기차를 놓쳐 몹시 분하고 원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니기미, 찻삯만 날렸네> 하며 또 한 번 자갈들을 차주셨지. 기차를 함께 타고 왔던 동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역무원은 방금 떠난 기차를 놓쳐 무척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역사를 빠져나가는 우리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고 하네. 이것으로 무임승차는 완전 성공을 거두게 되는 거지.”

모든 것이 어수룩했던 그 시절 그렇다고 그렇게 순수하지만도 않았던 할아버지의 뒷이야기가 뒷마당 테라스에서 이어져가고 있는 동안 너도밤나무의 달빛 그림자는 유령처럼 흔들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여우 울음소리가 못 마땅한지 토지 할아버지네 개는 컹컹대며 자꾸 짖어댑니다. 저 청이, 안에서 담요를 꺼내 와 한 장은 사장님 무릎에 또 한 장은 양 마담 어깨에 둘러드렸어요. 이런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배 사장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우리 청이 이제 시집가도 되겠네>하며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네시네요.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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