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청이, 배 사장님이 사 오신 <핫 크로스 번(Hot Cross Bun)>이라고도 하는 이스터 빵을 포도주에 적셔 한 입 베물어 봤어요. 향긋한 계피향이 입 안에 부드럽게 퍼지네요. 이스터 빵은 밀가루에 계피가루를 넣고 둥글게 반죽해서 럼주에 불린 건포도를 얹어 오븐에 구워낸 빵이에요. 특이한 것은 빵 위에 십자 모양으로 장식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시드니 대부분의 빵집은 바빠집니다. 팔을 걷어붙인 제빵사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따끈따끈하게 잘 구워진 빵을 식힘 망에 얹어 들고 나오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손님들은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빵을 킁킁 냄새를 맡아가며 열심히들 사가지요. 부활절에는 토끼모양을 한 초콜릿이나 삶은 달걀에 그림을 그리거나 칠을 해서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저 청이도 승원 씨한테서 삶은 달걀을 선물 받았어요. 어제 오후였는데 카페에 떨어진 식자재를 배달하러 왔다가 제 에이프런 앞주머니에 슬며시 넣어주고 가더군요. 

사장님은 배 사장님이 따라 주신 와인으로 목을 한번 축인 후 할아버지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시겠다며 입을 떼시네요. 하지만 저 청이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는 면도 있지만 끝날 듯 끝날 듯 하면서 너무 길게 이어졌기 때문에 이젠 좀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게다가 저로서는 이해 못하는 부분도 꽤 있었어요. 가령 부모와 자식 간의 일방적인 복종관계라든가 승차권 검사방법 등이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 몇 번이나 되묻고는 했어요.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으셨지. 밑으로 동생 다섯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분의 몫이었어. 그러니 요즈음 말하는 소년가장인 셈이지. 한때 타관으로 머슴살이를 떠났었는데 그것만으로는 가난을 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열아홉 되던 해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가셨다고 하더군. 혼자서 밀항을 하신거야. 낮에는 부두에서 일하고 밤에는 인력거를 끄셨어.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오늘처럼 달이 휘영청 밝았던 보름밤이었을 거야. 요정에 손님을 실어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서 돈 보따리를 줍게 되지. 횡재였지.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불로소득이며 외화획득이라고 할까.”

이 말이 끝나자 배 사장님과 양 마담은 잘 믿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재미있는지 테라스 바닥을 발로 구르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합니다. 이 소리에 놀라 뒷집 토니 할아버지네 개는 또 한바탕 컹컹대며 짖었고요. 유령 서넛은 충분히 들어앉아 있을 거 같은 컴컴한 너도밤나무는 마른 잎사귀와 열매를 뒷마당 잔디 위에 우수수 뿌려놓았습니다. 

일본서 돌아온 후에 할아버지는 주운 돈으로 얼마간의 농사지을 땅을 장만했답니다. 그러나 어엿한 땅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남의 집 머슴 일을 다니셨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사장님 부친을 포함해서 여섯의 자녀를 두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소문같이 인색하지만은 않았다고 한 쪽에서는 말한답니다. 추석이나 설에는 배고픈 이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고 허옇게 서리 내리기 시작하면 가난한 이웃에게 입을 것을 줬으며 당신은 비록 배우지 못했어도 배움이 최고의 재산이라는 생각에서 아들 모두를 대학까지 보내셨다고 하네요. 

“어려서는 소년가장으로 식솔을 책임졌고 젊어서는 머슴과 인력거꾼이셨으며 그 후에도 지독한 노랑이로 한 평생을 보내셨지. 호랑이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무섭기는 했어도 한편으로는 참 불쌍한 양반이야. 할아버지는 결핵약 냄새가 물씬 풍기고 한켠에는 가마니틀이 놓인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셨어. 그 분이 선산에 묻히신 후 병석에서 늘 깔고 계시던 요를 들추자 아마도 시모노세키에서 주웠던 돈의 일부일지도 모르는, 하지만 이젠 쓸모가 없어진 구일본화폐 뭉치를 보았을 때 우리 일가친척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만 했어.”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처럼 쿠링가이가 달빛으로 가득 찬 밤이면 사장님은 저 달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저 청이는 생각해요. 저 밝은 보름달 덕분에 사장님 할아버지는 시모노세키 길거리에서 기적에 가까운 돈 보따리를 주울 수 있었고 그게 밑바탕이 돼서 농사지을 땅을 사실 수 있었고 그 덕에 우리 사장님도 비교적 여유로운 가정에서 성장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잖아도 조용한 쿠링가이가 부활절 휴가를 맞아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더 적적합니다. 하지만 노랗고 차분한 달빛이 빈 공간을 빽빽이 채우고 있습니다. 양 마담은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들어가 커피나 마시자고 하네요. 그러는 사이 사장님과 배 사장님은 상당히 취하셨는데도 여기서 술 한잔 더하자고 의기투합을 하시네요. 저 청이 쓰러진 빈 술병이나 치워야겠어요.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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