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내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카페, 쿠링가이
(27) 오늘의 소멸은 미래의 탄생을 위한 거란다
한호일보 | 승인 2016.07.21 16:49

카페를 자주 찾는 손님 중에 일흔을 조금 넘긴 버트 할아버지라는 분이 계세요. 사고로 한 쪽 손목을 잃은 버트 씨는 작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손자를 데리고 헉스베리 강을 오르내리며 강변마을과 섬에 편지를 전달해주는 우편배달부입니다. 이제는 사라져 가는 마지막 우편선의 주인공인데 요즘 벌이가 시원치 않아 카페에 오시면 늘 한 잔의 럼주로 그날의 노고를 풀어놓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돼 보이셨는지 사장님은 이따금 럼주 한 잔 더 갖다 드리라고 제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오세요. 

카페, 쿠링가이는 한 달에 두 번 문을 닫아요. 그런데 오늘이 마침 그 휴일이라 저 청이는 사장님을 모시고 아침 일찍 우편선이 정박해 있는 헉스베리 부두로 나갔어요. 오래전부터 버트 씨는 우리를 우편선에 초대하고 싶어 하셨거든요. 버트 씨는 선반에 우편물과 섬 주민들에게 배달할 오이, 양파, 과일, 달걀 등을 올려놓은 채 토스트와 진한 커피를 드시고 계셨어요.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친 버트 씨가 맹그로브 숲속을 헤치고 천천히 배를 몰아나가자 <솨아>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코카투가 일제히 날아오르네요. 빽빽하게 들어선 원시림과 솟아오른 암벽 사이로 흑갈색의 질펀한 헉스베리 강이 소리 없이 흘러갑니다.

버트 옥스퍼드가 우편배달부가 된 사연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어요. 버트 씨 이전에도 옥스퍼드 집안은 4대가 모두 이 근방에서 우편물을 배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조부인 케빈 옥스퍼드는 헉스베리 강 서쪽에 위치한 윈저의 배달원이었는데 무척 괴짜였다고 전해집니다. 연미복에 실크 모자를 쓰고 배불뚝이 큰 가방을 옆에 낀 채 26년 간 편지배달을 했다고 합니다. 한 손에 스틱까지 쥔 채 후미진 산길을 돌아 집집마다 찾아가 편지를 전해주면 수취인은 1페니 짜리 동전을 내밀었다고 하네요. 월급이 따로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돈을 직접 받아 생계를 해결했나 봅니다. 

4 노트로 천천히 움직이는 우편선이 처음으로 들른 곳은 댕가 섬입니다. 부두에서 고동을 울려대자 강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할아버지 한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시네요. 버트 씨의 손자인 꽁지머리 청년이 우편물과 조간신문을 전해준 후 과일과 채소를 부려놓자 나루터는 금방 청과물 시장으로 변해 버립니다. 강가에 나 앉은 집 뒤로 자그마한 교회당이 보입니다. 대 여섯 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보잘것없이 작은 교회당인데 이 작은 섬에서 바랄 것이 무엇이고 회개할 죄는 도대체 무엇인지 저 청이 잠시 생각해 봤어요.     

이름도 말랑말랑한 <무니무니>라는 동네를 지날 때였어요. 버트 씨가 오른 손을 추켜들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시커멓게 타 들어간 산등성이가 보이네요. 지난 여름의 산불 때문에 저렇게 초토화 되었다고 합니다. 호주의 산불은 보통 몇날 며칠 씩 이어지며 집과 농장을 비롯해서 광활한 산림을 집어삼킵니다. 그러나 호주의 산불이 자연을 파괴만 하는 건 아니라네요. 온 호주대륙을 덮다시피 한 유칼리나무는 껍질 밑에 다량의 고농도 오일을 지니고 있는데 이 오일들은 인화성이 아주 강해 뜨거운 여름날 햇빛 아래에서 저절로 쉽게 발화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발화된 불은 삽시간에 옆 나무로 번져가며 숲을 태우게 되는데 이런 산불이 오히려 생명창조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네요. 어떤 씨앗은 불에 그을리지 않으면 발아되지 못 할 정도로 껍질이 견고하다고 합니다. 

“이런 식물들은 주기적으로 화염에 휩싸여 콩 볶듯이 튀겨져야만 종족번식이 가능해지는 거란다. 그러므로 때로는 산불이 다음 세대의 싹을 틔우는 데는 필수적이라는 소리이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소멸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거룩하고도 장엄한 자연의 법칙이로구나. 산불이 지나가고 얼마 안 있으면 검게 그을린 나무에서는 새싹이 돋기 시작하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던 하늘에는 새가 날아들며 숲을 떠났던 산짐승들도 하나 둘 돌아오고 자연은 이렇게 빈곳을 어김없이 다시 채워주는구나.” 

200년 전의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 호주 개척시대의 타임머신이라고도 부르는 헉스베리 강변의 쿠링가이를 두고 언젠가 버트 씨가 말 한 적이 있어요. 자신이 여기 이 후미진 동네에 살고 있는 진짜 이유는 공기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별로 변한 게 없는 쿠링가이가 마음이 편한 고향 같아서라고. 그러면서 옥스퍼드 집안 남자들이 90년 간 대대로 헉스베리 강변을 돌며 편지를 배달한 것처럼 인생이란 회전목마와 비슷하다고 말하세요. 특별하거나 크게 달라질 게 없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말이에요. 그럼에도 손자만은 헉스베리 강의 우편선을 떠나 대도시에서 직장을 얻어 살기를 원한다면서 부모 없이 자란 손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씀하세요.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생명을 위해 콩 볶듯이 튀겨지며 시커멓게 타버린 유칼리 숲을 바라보는 버트 씨의 눈에 수심이 가득하네요.

박일원(수필가)

한호일보  info@hanhodaily.com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호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Suite 2, L1, 570 Blaxland Rd. Eastwood NSW 2122 Australia  |  Tel : 1300-1300-88 / 02-8876-1870  |   Fax : 02-8876-1877
Copyright © 2019 HANHO KOREAN DAILY. All rights reserved. mailto : info@hanho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경환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