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수족관계? 
“형제는 하늘이 내려주신 벗”이라는 속담을 비웃기라도 하듯, 명절 뒤에 ‘형제간의 칼부림’이란 골육상잔이 설이나 한가위같은 명절 끝물의 자연스런 한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추석 형제 칼부림’ 등의 키워드를 두드려 검색해 보시라, 수백의 검색결과가 경악케 할 것이다.  
  
“형제는 수족(手足)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이 떨어졌을 때에는 새 것으로 갈아입을 수 있지만, 수족이 잘리면 잇기가 어렵다”고 한 장자의 말이나, “형제가 서로 싸우고, 때리고, 맞고, 욕하고, 절교해도 골육은 골육이다. 여차할 때는 달려와서 힘이 되어 준다”고 한 도쿠도미 료카의 말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말인가? 어쩌면 이들의 말은 검증된 말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표현으로 피상적인 이상적인 형제관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형제가 원수 되면 그 어떤 원수보다도 사이가 나쁘다”고 하면서,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추악한 죄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에서 인류의 ‘처음 형제’는 살인으로써 비극의 종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첫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현장은 너무나 어이없게도 신에게 제사 드린 그 현장, 가장 신성한 자리였다. 요즘말로 하면 추석에 차례 지내고 형제간에 재산 문제로 선혈이 낭자한 칼부림이 일어나고, 형제를 살해한 사건이나 진배없다. 사회면 톱 기사감인 이 사건을 좀 더 세미하게 살펴보자. 

신에게 실망하다
가인은 자기가 바친 제물이 최고이며, 당연히 신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리라고 믿었다. 제물은 둘째치고라도, 자신까지 거절당했다는 것은 더 참기 어려웠다. 생전 처음 당하는 이 거절감에 분노가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신의 음성이 들렸다.       
        
“가인아, 가인아! 네가 그토록 분노한 것은 어찌된 일인고? 네 얼굴이 그렇게 변한 것은 또 웬일이냐?”

가인은 이 말씀을 듣고 얼마든지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신과 자기와의 관계를 더욱 새롭게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신은 가인에게 보다 열린 마음으로 신에게 솔직히 나아와 아뢸 수 있는 결정적인 대화의 자리를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인은 그 음성에 들렸지만 대꾸조차 않았다. 신이 실망스러웠다. 신을 괜히 믿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까지 믿어오며, 신에게 제사 드린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분노도 일어났다. 동생과 차별대우하며, 동생 앞에서 자존심을 완전히 깔아뭉갰다고 생각되니 신이 원망스러웠다. 소외감도 들었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신 앞에 가인의 마음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심리학자들 말로는 사람이 몹시 화가 나면 IQ가 80-돌고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을 할 수 없다. 또 극한 슬픔에 빠지면 IQ가 70-원숭이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뭘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이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화가 한번 나면 아무리 작은 것도 기분 바꾸는데, 대개 여자는 5분이 걸리고, 남자는 30분이 걸린다. 명심하시라! 화가 난 남자는 건드리지 말고 바나나나 먹을 것을 갖다 주면 된다. 이미 화가 난 그의 인지능력은 돌고래, 원숭이 수준으로 떨어져 있으니 말이다. 

가인의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분노와 시기를 절제하지 못했다. 신으로부터 거부당하고, 동생으로부터 졌다는 생각이 지글지글 불처럼 타올라, 그토록 총명하던 그는 순간, 골고래 수준으로 인지수준이 떨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무심결에, 혼이 빠져서 돌을 집어 들었다. 그 옛날,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가 부부싸움할 때 돌멩이를 들고 서로를 제압하려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게 상당히 효과가 있을 것같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돌멩이 하나를 들고 동생을 한번 쳐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이 빠져 나가는가 했더니 어느 새 동생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순식간에 땅이 흥건히 적다. 순간적으로 겁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생을 땅 속에 암매장하고 말았다. 

분노의 저주
이것이 가인의 파멸 전말이다. 가인에게 가장 큰 저주는 무능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철 넘쳐서 절제하지 못한 능력이 저주였다. 안전핀을 뽑아버린 수류탄 같은 능력으로 동생을 내리쳤으니 단 한 번의 손놀림에 절명하고 말았다. 가인도 속상해서 돌멩이는 들었지만, 솔직히 죽일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그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오르자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말았다.   

가인처럼 얼마나 쉽게 죄가, 분노 시기 질투하고,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어와 죄짓게 하며, 죄의 노예로 만드는지 모른다. 분노는 암살자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독약을 만들어내며, 살인자의 칼을 날카롭게 한다. 분노는 살인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사형집행관의 예리한 도끼도 날카로운 질투의 반이 못된다”고 했다. 그렇다. 가인에게서 보듯이 분노와 질투는 다른 사람의 살인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의 영혼까지 죽이고 말았다. 
기억하자. 중세시대 때 젊은 기사 지망생들은 기사도를 연마하기 위해 철야 밤샘 기도할 때에는 신의 제단에 날카로운 칼을 올려놓았다. 왜냐고? 능력을 상징하는 이 칼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저주의 능력이 되기도 하고, 축복의 능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바른 기사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열등감, 증오, 살인
가인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 어릴 적부터 소꿉장난하며 함께 성장해왔고, 고운 정 미운 정 다 든 동생을 순간적으로 쳐 죽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신에 대한 분노가 마침내 동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이 열등감은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로 활활 타올랐다. 그 마음속엔 동생만 제거하면 다시 신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그릇된 환상과 야망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장전되어 있었다. 가인을 특징짓는 말을 몇 단어로 요약하면 경쟁, 질투, 분노, 두려움과 증오, 살인같은 말들이다. 

물론 A. 아들러같은 심리학자는 “사람이 경쟁심을 키우고 자신감을 갖는데 형제간의 경쟁의식(Sibling rivalry)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경쟁의 결과로 패자의 마음에 분노를 불러올 때는 결코 선할 결과를 기대할 수 없고, 승자의 마음에 자만이 끓어오를 때는 고상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이처럼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며, 사랑하는 동생이나 가족까지도 경쟁상대로 보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가인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는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마음속으로 살인한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가? 항상 내가, 내 자식이 최고여야 하며, 내 주장만이 완전무결하며, 내 자식이 항상 남의 자식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는가?

송기태(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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