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요즘 특별히 힘든 일 있수?” 

“아니, 왜?” 

“지난번 글에 ‘장자’를 인용한 걸 보니.”
 
“장자가 어때서?” 

“무릇 세속에 시달리면 장자를 찾게 되는 법이잖유.” 

그랬나 봅니다. 요즘 제가 장자와 연애를 하다시피 하는 이유가 그거였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중매를 서지 않는다’는 장자의 말을 빗대어, 치이고 지친 마음에 쉼을 얻고 싶었던 차에, 대학 후배가 저의 그런 속내를 알아챈 것입니다. 

후배의 말이 아니라 해도 저는 요즘 장자에 ‘꽂혀’ 있습니다.’ 솔직히 ‘양다리, 세다리 걸치기’도 서슴지 않습니다. 장자 뿐 아니라 예수도 사귀고 동시에 붓다도 만나는 거지요.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의 비루하고 처절한 백성의 삶에 비하자면 ‘요강깨는 호강’이지만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으니 우리 시대도 장자의 위로를 받을 만합니다. <장자>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 본성에 기인한 삶의 양태를 관통하는 사상이기에 2,300년이 지난 지금의 사람살이에도 '훈수'를 둘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아 밖에 놓인 일체의 ‘타자’와 이른바 ‘밀당’을 해야 하는 것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니, 나의 욕망과 타자의 그것이 충돌하는 가없는 갈등 속에 우리 모두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언제나 제자리걸음 아니면, 한 발 나갔나 싶으면 두 발 뒤로 가 있고, 안 하니만 못한 ‘빽 도’를 하질 않나, 속된 말로 ‘죽어라, 죽어라’하는 사람들, ‘언제 출발이나 해봤어야지 돌아갈 초심이라도 있지.’ 할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는 말, 귀어초심(歸於初心), 즉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에서 하는 수 없이 쓰게 되는 ‘페르소나’라는 것, 이런저런 가면들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상대도 나 못지 않은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기에 서로의 민낯을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 경우,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느라 속칭 ‘이미지 관리’라는 것에 매달려,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땐 매우 ‘쪽 팔리곤' 하니 그럴 때의 참담함이라니… 

어느 순간 가면과 이미지를 벗어야 할 때, 쓸려나가 너덜거리는 피부처럼 아린 비애와 몰려오는 자괴감 또한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동안 좌절과 쓰라림을 맛본 후 견딜 만해지면 그것을 또 뒤집어쓰고 ‘저잣거리’를 헤맵니다. 그렇다고 참람스러운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니, 가히 전국시대 사람들만 살기 힘든 건 아니라고 할 밖에요. 

장자는 이럴 때 ‘귀어초심’과 유사한 말로 ‘천성’으로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 

오늘날의 ‘이미지’를 장자 식으로 말하면 ‘인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는 ‘소와 말에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 이것을 천성이라 하고 말 머리에 고삐를 달고 소의 코에 코뚜레를 하는 것을 인위’라고 설명합니다. 장자는 인위로 천성을 가리지 말며, 허명을 얻기 위해 타고난 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해도 잡아 늘이면 괴로워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더라도 잘라주면 아픔이 된다고 말하며 자연스러운 것을 인위적으로 왜곡할 때 본성이 훼손되어 고통이 따른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자> 뿐 아니라 <노자>에서도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보폭을 넓게 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 사람들이 ‘인위’에 얽매여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나, 현대인들이 ‘이미지에 목숨 거느라’ 자신의 본성을 잃고 작위적인 삶 속에 밀랍처럼 갇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문명화되면 될수록 인간은 자연과 멀어져 본성을 거스르는 인위 속에서, 허우적대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댑니다. 

장자를 만난 이후 제 천성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장자의 가르침대로 천덕(天德)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생업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천덕’을 지키는 ‘천덕꾸러기’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유지하고 싶은 천성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솔직담백함’이라는 자신의 대답이 돌아옵니다. ‘너무 홀딱 벗어서’ 상대가 당황스러울 정도의 천성적 솔직함을 버리지 않고도, 밥을 굶지 않고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그러고 싶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금 장자 식으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렇다.’라고 밖에요.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1992년에 호주로 이민,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현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사등과 일하며,  중앙일보, 스크린골프다이제스트, 자유칼럼그룹, 자생한방병원, 여성중앙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 (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 :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http://blog.naver.com/jinwonkyu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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