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병간호를 하는 한 호주 여성이 의미 있는 일을 했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감지한 양로원 노인들이 이 아가씨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들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다들 스스로 이야기한 걸 보면 아마도 아가씨가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을 편하게 하는 성격을 가졌던가 봅니다. 이 아가씨는 생의 종착지에 다다른 노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매번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걸 추려내니 죽음 앞에서 가장 많이 하는 다섯 가지 후회로 압축이 되더랍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난 나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따라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 내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다. 

2.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젊어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신 우리 아버지조차 내게 하신 말이다.) 대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 어느 날 돌아보니 애들은 이미 다 커버렸고 배우자와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내 속을 터놓을 용기가 없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았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다들 죽기 전에 그러더라고. “친구 아무개를 한 번 봤으면…”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겁이 나서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끝으로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궁궐 같은 집에서 한번 살아봤더라면, 고급 차 한번 못 타 봤네, 애들을 더 엄하게 키웠어야 했다”라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부연입니다. 

솔직히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입니다. 몰라서 못 하는 것보다 알면서도 안 하는 것에 생애 대부분의 문제가 걸리듯이 죽음 앞에서 직면하는 이 다섯 가지 명제 또한 그러합니다. 

지인은 ‘균질화된 삶, 균질화된 후회’라는 말로 ‘지금처럼 이렇게 사는 끝이야 다들 뻔한 것 아니겠냐’는 뜻을 대신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 아니라 실은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 섬뜩합니다. 그래서 더욱 절망스럽습니다. 다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이라는 말만이 선연히 떠오를 뿐입니다. 

영혼을 야금야금 떼어 팔면서 욕망을 충족시켜 온 생의 막다른 길, 후미진 골목 끝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섯 가지 후회’와 맞닥뜨리게 된다는 ‘통한의 증언’은 악마와의 거래로 결국 생 전체를 집어 삼키우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합니다. 

파우스트와 악마의 계약 기간은, 나와 나의 욕망이 맺은 계약 기간, 즉 삶의 전 기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생의 끝에서 통째로 악마 메피스토의 소유가 되어 버릴 불쌍한 내 영혼의 탄식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돈을 더 버느라고, 궁궐 같은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고급 차를 타고 남들 앞에서 폼을 잡고, 자식을 일류 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얻고 싶어서 일평생 발버둥을 쳤으니까요. 

‘돌이키고 싶어도 절대로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 저는 이것이 곧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철로를 질주하며 다가오는 열차를 전 존재를 던져 감싸 안을 자세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설경구의 이미지가 바로 지옥을 앞에 둔 자의 모습입니다. 

북 아일랜드 출신 기독교 변증가이자 소설가 시 에스 루이스(C.S Lewis ;1898-1963)는 고독과 분노, 증오, 질시, 참을 수 없는 갈망, 관계 단절로 자기 고집과 집착에 갇히는 것, 각각의 사람이 마음 문을 닫고 자기만의 동굴을 만드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아무도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그래서 공동체가 죽어가는 것, 이것이 곧 지옥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지옥을 ‘살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쯤, 저도 호주 노인 요양원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아가씨의 깨달음처럼 저도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죽을지 궁금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요. 왜냐면 사람은 살아온 방식대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 안에, 사랑 안에 있다는 자체가 천국입니다. 기대고 치대고 의지하고 바라고 실망하고 부대끼고 다시 시작하고…, 사람 사이에 영혼의 들락거림을 허하는 것, 그것만이 죽음 앞에서 후회를 줄이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1992년에 호주로 이민,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현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사등과 일하며,  중앙일보, 스크린골프다이제스트, 자유칼럼그룹, 자생한방병원, 여성중앙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 (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 :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http://blog.naver.com/jinwonkyu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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