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볼일 없는 하루다. 그 많던 새들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쩌면 이세상 나 혼자 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날이다. 나갈 채비를 한다. 조용한 길을 지나 시장에 도착했다. 허기진 배를 붙잡고 시장을 둘러보다 호두만한 살구 앞에 멈춰서 봉지하나를 꺼내 살구를 담는다. 집으로 돌아와 씻어본다. 어릴 적 먹었던 살구는 참 탐스러웠는데, 내 손의 들려있는 살구는 이곳 저곳 상처투성이다.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학교 앞 운동장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 중의 으뜸 인기스타는 살구나무였다. 살구나무 아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작은 시골 학교 전교생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구나무 아래에 서면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맴맴 짖어댔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었던 나에게 살구나무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아주 성스러운 나무였다. 나는 높은 나무를 위험하게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운동장 모래 위에 떨어진 살구를 주울 뿐이었다. 모래를 툭툭 털고 주워 들은 살구는 내 한 손을 꽉 채웠다. 

어린 시절의 운동장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언니를 만나기도 하고, 옆집 오빠를 마주치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누군가 나를 부를 때면 ‘전교회장 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회장이라는 명함이 붙는 것을 좋아했다. 살구나무 밑에서 언니를 만나는 날이면 떨어진 살구를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언니 옆에 있는 오빠 한 명이 나무 위로 올라가 살구나무를 흔들어 주면 떨어지는 살구를 받아서 ‘후후’ 불어 입으로 넣었다. 그 맛은 떨어진 살구와 같았다. 내가 주워 먹었던 모래 위 살구 또한 누군가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린 후 다 줍지 않고 남겨 놓았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도 그 정도의 정은 있었다. 

시장에서 사와 깨끗이 씻어 식탁 위 가지런히 올려두었던 살구 하나를 꺼내 든다. 상처 입은 살구를 씻어 놓아 조금은 물러진 살구를 손에 쥐소 반으로 살짝 가른다. 어린 시절 한 손에 꽉 차던 살구는 움켜진 손 사이로 공기가 통할 만큼 여유롭다. 세월이 흘러 여유로워진 것은 살구를 움켜진 손뿐인 것 같다. 새콤달콤한 추억을 맛보니 그 시절이 그리워 진다. 

반으로 갈라 말려둔 살구의 씨앗을 가지고 텃밭으로 나간다. 햇볕 드는 모퉁이를 골라 심어본다. 오늘 심은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 살구나무 아래 그늘 속이, 지금은 얼굴조차 모르는 이웃들과의 웃음꽃 피는 만남의 광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바람이 분다는 것

잠에서 깨어 창을 열어본다. 살랑 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같은 것은 푸른 하늘뿐인 곳에서 오늘도 나는 작은 정보의 창을 통해 손가락 하나로 내 고향 그 곳의 소식을 본다.

마당으로 나선다. 이곳의 하늘은 참 맑고 구름 한 점 없다. 호주의 땡볕아래 바람은 하나의 숨통 같아 시원한 큰 숨을 쉬어본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 해야 하는 내 고향 그곳은 더욱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다. 뜨거운 바람 속 사람들의 염원과 열기가 있다. 

마당을 거닐다 시원한 바람에 이끌려 텃밭을 가꾼다. 땡볕 속 처참히 고개 숙인 꽃들이 살랑 살랑 부는 바람 덕 기분 좋은 내 손길로 가꾸어진다. 흥얼거리며 가꾸던 꽃 중 예쁜 놈을 골라 꽃병에 가둔다. 찰칵 찰칵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네모난 사진으로 만든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다가온다. 서둘러 몸을 피해 식탁에 앉아 사진 속 꽃을 보며 생각한다. ‘너도 추위와 역경을 이겨내고 자라난 것일 텐데 사진 속 너는 너무 평화롭구나 누군가 이 사진만 본다면 그 동안 겪은 역경을 상상조차 하지 못 하겠구나’ 내 머리 속 꽃의 사진과 저 먼 곳의 현실 세계가 맞닿는다. 사진 속 이 꽃처럼 멈춰진 세상을 손가락 하나로 보며 듣는 것은 단지 작은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산란해 진다.

늦은 오후, 보기 싫던 먹구름이 일렁이는 바람 덕에 물러난다. 이곳의 바람이 먹구름을 움직이듯 같은 하늘 그곳의 바람은 세상을 움직이고, 사진 속 예쁜 꽃 보다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다.

잠들기 전, 다시 본 손가락 세상은 컴컴한 어두움 속 작은 불빛이 모여 꺼지지 않는 산을 이루었다. 나의 눈, 나의 심장은 같은 하늘아래 그곳에 향해있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신나리 당선소감]

어린 시절 꿈이 큰 소녀였습니다.
세상은 나로 인해 움직이고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주인공인줄 알았습니다.
그 꿈 많던 소녀는 세월의 흐름과 동시에 나의 크기도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의 생활은 더욱 더 나를 작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꿈 많던 소녀였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혼자만의 위로가 되었을지 모를 나의 글을,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누게 해준 신년문예 주최측 및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언제나 나의 길을 응원해주는 사랑하는 남편과 항상 옆에서 도움 주시는 시댁 식구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언제나 그리운 나의 가족, 어머니와 언니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또한 미래의 소중한 과거가 되겠지요. 행복한 하루하루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수필 심사평] 오기환 (수필가)

본선에 올라온 작품을 읽었다. 수필은 인간학이라고 한다. 수필쓰기는 서두가 말미를 써준다고도 한다. 

이는 오래도록 읽고 쓰고 생각하면서 글쓰기 하시는 선배들이 한 말이다. 그렇다. 조금 거칠더라도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나타내며 차별성 있는 소재로 글감을 다루고 나만의 목소리로 말할 줄 알아야한다. 

 수필은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표현하면서 소재를 자기화해서 감동을 주어야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종적으로 신나리의〈살구나무〉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은 평범한 소재를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나타내며 자기화한 작품이다. 특히 살구나무를 통해서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고 이를 현재와 대비하면서 관조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한 문장과 저자만의 적절한 표현은 일품이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운동장은 만남의 광장이었다.”라든지 “지금은 얼굴조차 모르는 이웃들과 웃음꽃을 피우는 만남의 광장이 되기를 시대해 본다.”라는 작자만의 표현을 높이 사고 싶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서두가 말미를 써준다는 말처럼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위해서는 서두문장에서 암시가 있어야하는데 이런 부분이 미흡된 것은 앞으로 글을 쓰면서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이럼에도 이 작품은 소재를 자기화하는 부분이 뛰어나기 때문에 당선작으로 정하는데 무리가 없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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