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 득표율 51.7%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만장일치 탄핵으로 물러나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성대통령이 된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20년의 정치생활 끝에 헌정 사상 처음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이란 불명예로 끝나게 됐다.

1997년 정치에 입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년간 영남과 보수층을 기반을 두고 대통령까지 올랐으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수세에 몰리다 탄핵을 당하는 영욕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게 됐다. 

1952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큰 딸로 태어난 박 전대통령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하고 5년 뒤 아버지 박 전 대통령마저 김재규의 총탄에 숨지면서 비운을 맞았다. 이때 주로 은둔생활을 했던 박 전대통령은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으면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됐고 이때 최태민 목사와 딸 최순실씨의 남편 정윤회씨 등에 의지하게 됐다.

박 전대통령은 45세인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1998년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박 전대통령은 이회창 후보를 통해 당이 두 번 연속 정권 창출에 실패한 뒤, 2004년 첫 여성 당수가 됐다. 이후 한나라당 차떼기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도 ‘천막 당사’를 발판 삼아 승리를 이끌면서 보수의 잔다르크, 우파의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특히 2006년 지방선거 때 면도칼 테러를 당하고도 “대전은요?”라며 선거를 챙기는 식으로 여론을 움직였고, 2년 3개월간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박 전대통령은 2011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다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등판했고, 이듬해 총선을 다시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정해 이명박 정권과 차별화 했다.박 대통령은 2012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대한민국과 결혼해 사심이 없고 친인척 비리의 여지가 없다’ ‘뒷거래가 아닌 원칙으로만 승부해 나라를 바로세우겠다’라고 해 지난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에 몸서리 쳤던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취임 초 ‘국민 행복국가’를 기치로 걸고 한반도 비핵화 노력, 통일 대박론, 창조 경제, 문화 융성 등 통일외교,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다각적인 성과 속도감있는 정책을 수행했으나 측근인 최순실의 무분별한 국정농단과 불통 논란, 잇단 총리 후보 낙마 인사 사고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됐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7시간 행적논란과 책임논란은 국회의 탄핵 소추안에도 포함될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을 임기내내 괴롭혔다. 

박 전 대통령은 임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당내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비박계와 갈등을 빚기시작했고 결국 지난해 4.13 총선에서 야당에게 참패해 내리막길을 걷게됐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각종 악재에도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공고히 지켰으나, 임기 후반으로 접어든 2016년 7월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은 처음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부 진보단체와 야당의 주도로 서울 도심에서 퇴진 요구 촛불시위가 잇따르자 12월 국회는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수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시기를 놓치고 사과내용의 수위도 제대로 잡지 못해 반전의 분위기를 잡지못했다. 이후 청문회를 거치면서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면서 국민의 분노를 사게됐다.

친박단체를 중심으로 한 지지층이 ‘태극기 집회’ 등을 통해 반격을 도모했으나, 케이스는 결국 특검과 헌법재판소의 손으로 넘어갔다.

헌법재판소는 세월호 등의 관계에 있어서는 탄핵의 혐의점이 없어나 공무상 비밀 누설 등 최순실로 인한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없다고 판단해 만장일치로 탄핵을 결정함으로써 첫 여성대통령의로서의 영욕의 2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야인으로 돌아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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