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는 말을 짧게 한다. SNS가 생활의 일부분이 된 인터넷 세대인 만큼 줄임 말에 능하다. 다소 민망하거나 이해 되지 않는 말들이 있지만 이들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 결론이 도출되는 속전 속결의 소통이다. 답신이 없어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고 서론이 길면 용납되지 않는다. 이 세대는 줄임 말에 능통하다. 줄임 말은 젊은 세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기성세대가 줄임 말을 얼마나 잘 알아 맞추는지를 test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멘붕은 멘탈 붕괴의 줄임 말이다. 

넘사 벽은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란 말이다.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의 준말이다. 비번은 비밀번호를 말한다. 수없이 많은 줄임 말을 기성 세대는 다 알 수 없다. 시내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은 아침에 뜨거운 국을 주는 것은 아침부터 하루 기분을 망치기로 작정한 시비와 같다. 후딱 먹고 나가야 하는데 뜨거우면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음 화면이 나오길 자판을 바삐 두드리듯 조금 기다려 차분이 먹고 나갈 여유가 없다. 라면을 끓이면 뜨거운 국물은 모두 따라 버리고 거기에 찬물을 부어 단숨에 후루룩 삼켜 버린다. 기다리는 것이 끔찍이 싫어서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기다리는데 인색하다. 빨리 결론이 내려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편을 찾다 포기하고 만다. 얼마 전 극장에서 Silence라는 영화가 있었다. 미국 영화의 거장인 스코페이지 감독이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인 “침묵”을 영화화 한 것이다. 1640년대를 전후한 일본의 봉건시대의 천주교 선교가 배경 스토리이다.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파견한 존경 받는 스승 페레이라 사제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실한 로드리게스가 동료 사제와 함께 일본에 파송된다. 극렬한 고문의 고통을 견디며 신앙을 굽히지 않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순박한 신자들과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 자신은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도 곧 붙잡혀 오랜 시간 동안 극심한 고문을 견뎌야 하는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에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예수의 얼굴과 성경을 밟고 침을 뱉으면 죽음에서 모면 할 수 있었다. 그의 내면엔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주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거꾸로 매달려 상처로부터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적막한 죽음 같은 기다림 속에서도 신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그는 결국 스승 페레이라를 만나게 되고 그가 결혼도 하고 불교를 옹호하는 책을 써 나가야 하는 그의 논리를 들으며 갈등하지만 결국 그도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만다. 영화는 예수의 얼굴을 밟고 침을 뱉으며 죽음을 모면하는 비겁한 배교자의 모습으로 그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장례식에 죽은 사제의 손에 움켜진 십자가 묵주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남기고 영화는 끝난다. 극장에 한 동안 암흑 같은 적막이 흐른다. 무거운 ‘신의 침묵’의 이유를 대답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시 다그쳐 묻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끝없는 것 같은 기다림을 견딜 수 없다. 위대한 사제의 배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합리화하는 피조물의 어설픈 핑계일 수 있지만 침묵하는 신에 대한 항변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리를 만든 신이시면 우리를 돌봐야 하지 않습니까?” 유대교는 순교를 위한 순교를 찬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피조물이 피할 수 있는데도 생명을 버리는 것을 죄인으로 여긴다. 신을 배신하면서도 끝까지 살아 남아야하는 저급함이 피조물의 근본 정체성이라는 말은 배신이 쉬운 인간에게 오히려 위안이 된다. 이 말은 아우슈비츠에서 ‘신의 침묵’을 통해 ‘신의 용인’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말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신은 얼굴을 감추고 과연 고통하는 자와 함께 계실까? 십자가 묵주를 움켜쥔 로드리게스의 처절한 염원에 “수고했어” 라며 등을 두드려주는 따스한 신의 손길을 그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예수의 항변에도 끝까지 대답하지 않은 ‘하나님의 침묵’은 결국 죄인의 구원을 위해 기다림이 필요한 ‘하나님의 이유’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침묵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리고 침묵은 진심을 확인하게 한다. 짧은 말로 빨리 소통을 끝내야 하는 이 세대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요구 하신다.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