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의 사진 필름을 살펴보고 있는 김 동규 선생의 최근 모습

[길에서 만난 사람들] 제목의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스토리, 평범한 삶 속에서의 이야기들이 공유되는 가운데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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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들] 첫 회는 베트남전(1955년 11월-1975년 4월) 종군 기자 김동규 선생 인터뷰입니다. 6.25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김동규 전 방송 기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음 주부터 ‘김동규 베트남전 종군기자의 참전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註)

 

 “베트남이 그립다기보다 젊은 그 시절이 그리운 것”
비스뉴스, AP등 프리랜서, 채널 10 기자로 은퇴  


“적들은 사방천지에 널렸지. 수많은 살인과 터무니없는 죽음들 그리고 그 누구도 상관하지않는 것 같아.

이제 내가 묻는다. 왜 내가 가야했고 왜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6만명이 죽었지. 당신이 여기있는 동안 당신은 우리 집에 찾아와 아이들을 데려갔지. 그리고 당신은 더 줄 수 없냐고 묻더군. 베트남 전쟁이여.”

블랙 엔젤스(The Black Angels)의 노래 ‘첫 번째 베트남 전쟁’ 일부다. 
미국이 패배한 전쟁, 베트남전. 그 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들의 일부는 남미로, 미국으로, 호주로 가서 낯설은 그 사회의 첫 이민세대를 일구었다. 호주 한인 이민 1세대 약 3천여명 중 월남전 참전군인 및 파월 기술자, 그 가족들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높았다. 

65년 말-70년 7월까지 베트남 종군기자로 베트남전을 보도한 김동규 선생(85세)은 종전 후 방콕으로 옮겨 비스뉴스(VIS news limited)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부인 김용무(호주 공무원 역임. 82세)씨와 외동 딸(지영. 당시 5세)을 데리고 81년 호주에 들어왔다.

김동규 선생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 잘 정리된 한 뭉치의 사진 필름과 종군 기자의 취재 기록을 가지고 나왔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로 국론이 분열된 안타까운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월남의 패전을 통해 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베트남전 취재기록 기고를 통해 교민들과 나누고싶다고 말했다.

● 어떻게 베트남으로 가게 됐나?
(충남 서천이 고향인 김 선생은) 1960년대 당시 공무원이었다. 50, 60년대 초 한국 공무원들은 열심히 일해 새로운 변화의 인프라를 만드는 기초작업을 했지만 그 성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았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넓은 세상에 나가 자유로운 가운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없을까하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가 월남파병을 결정했다. 1965년말 한국군을 따라 베트남에 갔다.
 

김동규 선생은 베트남전 종군기자로 일했다

● 전쟁터를 자원해서 간다는 것이 잘 납득이 안된다.
6.25전쟁 참전 군인으로 전쟁을 직접 겪으며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모진 고생을 겪은 터라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투지를 얻게되었다. 당시 비스 뉴스라는 영국회사에 들어갔지만 기자 경험이 전혀없던 터라 내게 봉급을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이공 지국 AP사진부장이 안전하게 취재하는 요령을 알려주고 필름과 카메라를 주었다. 그렇게 기자 일을 시작했다. 

거기서 김 선생은 호주 ABC, 캐나다, 영국 BBC등 기자들과 함께 일했다. 또 AP, 조선일보, 중앙방송, 미국의 소리, 비스뉴스 등에 기사를 제공하는 프리랜서라 각 회사로부터 기사가 채택될 때만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생명을 담보로 쓴 것 중 채택된 TV 기사 하나에 65년 기준 50달러였고 스틸(still)사진 한 프레임(frame)에 15달러, VOA방송기사 10달러였다. 동료 중 팀 페이지(Tim Page)같은 저명한 기자도 있었는데 취재 차 방문한 항공모함에 마침 화재가 발생했다. 그 장면을 취재한 스틸사진 한 프레임을 라이프지에 단독 제공, 당시 4천달러를 받는 특종을 올렸다.

● 베트남 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과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점심시간에 미국 헬리콥터 편대가 뜨거운 점심식사와 아이스크림을 싣고와서 병사들에게 급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막강한 힘을 목격했다.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유명한 세계 기자들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는 노력을 소홀히했던 것과 일기를 쓰지않은 것이다. 
 

“나라가 무엇을 줄 수 있나 보다 
나라위해 무엇할 수 있나  생각하라”

● 전쟁터였기에 매우 불안했을 것 같다.
전쟁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운 일상이었다. 여러차례 아내가 한국으로 가자해서 귀국했지만 70년대의 침체된 한국에서 할 일을 찾지 못했다. 다시 비스뉴스에 요청해 태국, 캄보디아 등을 취재하는 방콕 주재 동남아 특파원으로 일했다.

● 호주 이민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80년대 당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않은 한국보다는 평화롭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나라에 가서 살고 싶었다. 동료 닐 데이비스(Neil Davies)라는 기자의  권유로 호주 이민을 결정했다. (데이비스는 태국 군사 쿠테타 취재 중 태국군의 기관총에 부상을 입고 사망, 정작 본인은 고국 호주에 돌아오지 못했다). 딸을 위해 호주를 선택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채널 10방송에서89년까지 근무했다. 종군기자 때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프리랜서와 비스뉴스 특파원으로 일할 때는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았고 생명의 위험도 있었지만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을 결정하고 취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총체적인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채널 10에서는 조직의 작은 부분이 되어 마치 직공과 같은 단조로움의 연속이었다. 

● 어떤 계기로 전쟁 당시 기록을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했는가.
귀한 자료들을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의 한 부분인 베트남전 부분을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동포사회에 월남 참전 용사들이 많아 젊음을 보낸 베트남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젊은 시절이 담긴 그 곳에 대한 향수를 나누고 싶었다. 또 베트남 사람들이 왜 패망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고 싶었다. 

●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사회의 주축이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어디서 살든지 나라가 필요하다. 평화, 평등, 자유, 행복을 만들어주는 나라. 따라서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했으면 한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라가 잘되야 개인의 발전도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깝다. 2차대전 후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이룬 나라가 없다. 살고있는 나라의 가치를 인식못하고 한국을 저주하며 한국을 벗어나고 싶어하면 되겠나. 전쟁을 겪어보지않아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 80여년을 살아오시면서 과연 행복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보장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보장받게 되면 그 자리에 안주하게 된다. 높은 급여도 중요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또 누구와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잠재력을 현실화하고 미래를 개척,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시드니에서 손녀 (8세), 손자 (10세)를 돌보며 교회 장로로 부인과 함께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는 김동규 선생. 그는 “올해 안작데이에 한국군 참전용사가 10명정도 참가했는데 내년에는 더 적어질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번 주 일요일은 6.25 전쟁 발발 67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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