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
특보 : 사이공 정부 항복하다
총소리와 포성이 잠잠해진 1975년 4월 30일 아침. 월맹군 탱크 한대가 월남공화국 대통령궁 철문을 밀어부수고 경내에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병사 한명이 임시혁명정부기를 들고 탱크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 대통령궁 옥상에 게양되어있는 월남공화국기를 내리고 임시혁명정부기를 게양했다.

닐 데이비스(Neil Davis) NBC기자는 외신기자들 대부분이 월남에서 철수했지만 이 곳에 남아서 월남전의 역사적인 마지막 순간을 기록했다. 앨런 도슨(Allan Dawson) UPI 통신 사이공 지국장 역시 홀로 남아 월남기자들 몇명을 데리고 월남 패망의 소식을 세계에 타전했다.

“속보! 사이공 정부 항복(FLASH … SAIGON GOVERNMENT SURRENDERS)! ”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 부터 1973년 휴전 조인까지 한국 정부는  5만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둑코 전투: 빈딩성에 주둔하고 있던 맹호사단 기갑연대 3대대는 미군 제25사단 3여단작전을 지원하기위해 1966년 7월 9일 캄보디아 국경 둑코를 향해 180여대의 군수송 차량에 분승하여 180km 서쪽으로 이동했다.

대대 호송차량의 길이는 선두차량과 후미까지 길이가 무려 50km나 되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출발 전 맹호사단장 채명신 소장은 3대대장 최병수 중령에게 새 임무 수행시 지켜야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첫째, 2개중대의 전술기지는 포 지원사격 가능범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예비중대를 필히 배치해 둘 것.

둘째, 중대 전술기지는 24시간 안전방위하고 주변환경에 익숙하도록 주변수색 및 정찰지역을 넓혀나갈 것.

셋째, 적 공격이 시작되면 생명을 걸고 결전에 임할 것. 이를 위해 72시간 작전할 수 있는 식량과 탄약을 필히 비축하라.
180여대의 호송차량 전부가 14시 무사히 현지에 도착했다.

최병수 대대장은 각 중대에 전술기지의 위치를 배정하고 진지구축을 명령했다.

1. 사주방어 원칙에 따라 진지구축을 하되 중대 전술기지는 외곽과 내곽 교통호를 파고 사격호는 입사호로 파서 진지를 구축할 것.
2. 전방에 조기 경보장치와 조명탄을 매설할 것.
3. 적의 접근 방향으로 4-5개의 포사격 화집점을 진지에서 150-400 m 반경으로 미리 설치할 것.
대대장 명령에 따라 진지 구축이 시작되면서 한미간 작전 및 전술 차이로 마찰이 시작됐다. 이는 3대대의 작전경험과는 전술의 차이가 많아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맹호사단장이 이 작전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최병수 중령은 맹호사단장의 작전 명령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대대장 최병수 중령은 3일 간의 보급을 요청하였지만 3여단장은 자신의 작전명령에 따라 주기를 바라고 미군의 표준 보급지급기준에 맞춰 3대대에 보급했다. 긴급 상황 하에서는 2시간내에 필요한 보급 지원을 하겠다고약속하면서 105mm포탄 2,700개와 155mm 1,500개 요구량은 너무 많다고 거절했다. 최병수 중령은 두개의 지휘계통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힘들었고 어려웠다. 

3대대는 가중대로 하여금 수색지역을 넓히고 야간정찰과 잠복을 했다. 중대전술기지의 화력망 구성과 60mm와 81mm의 화집점도 잡아 놓았다. 이동한 지 3일후에 시찰나온 맹호 채명신 사단장은 최병수 대대장에게 3대대가 처해있는 상황을 다시한번 환기시켰다. 

"3대대는 비록 미군 작전 지원을 위해 미25사단 3여단 산하에 있지만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시오. 첫째, 이 지역의 적은 게릴라인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군의 정규군임을 명심하고 둘째, 최중령도 한국 전쟁에서 경험해 알겠지만 정규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공격해올 때는 한번 공격해서 실패하면 후퇴해서 재정비하고 2파, 3파 공격까지도 해오니 그럴 경우에도 적을 막아내고 물리칠 수 있도록 진지를 구축하라. 또 적의 파상공격을 막아 낼수 있도록 155mm 포 지원사격을 준비하되 보급이 용이한 155mm부터 사격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105mm 포 지원사격 하도록 명심하기 바라오.”

워커 장군 ”한국군같은 진지구축하라면 따라 올 미군없을 것”
진지를 구축한 각 중대는 정찰소대를 보내어 적의 침투가능 지역을 수시 정찰했다. 
다시 시찰나온 3여단장 워커 장군은 3대대 진지를 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적의 상황에 따라 가볍게 이동해야 하는데 이렇게 무겁게 진지를 구축하면 어떻게 하오? 그리고 포탄 비축이 너무 많소”.  그는105mm 포의 직격탄이 떨어져도 견디어낼 수 있는 대대장 지휘본부 구조물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미군 3여단 산하의 각부대 지휘관들이 3대대 진지를 돌아보고 ”한국군은 정말 미쳤군”하면서 힐난 반 감탄 반의 반응을 보였다.  “만일 내가 우리 부대로 돌아가 이같은 진지를 구축하라고 하면 아무도 따라 올 병사들이 없을 것이요.”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온 월맹군 병력들이 야드랑 계곡을 타고 월남 중부 지역으로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지역에 3대대가 그 길목을 막고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20여 일이 조용히 흘러갔다. 맹호산하 부대들이 모두 소강상태이고 조용했다. 맹호사단이 관장하고 있는 심리전 작전구역인 고보이 구멍고개는 베트콩관할지역 주민과 월남정부 관할하의 일반주민들이 농산품을 교역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 현황을 취재하던 중 필자는 사단 공보장교 정육진 대위가 달려와 캄보디아 국경에 큰 작전이 있으니 맹호 부사단장과 합류하여 헬리콥터로 함께 가자고해서 둑코로 날라갔다.

상공에서 바라본 9중대진지 주변에는 흰 손수건(*)이 가득히 널려있는 것이 보였다. 105mm와 155mm 포가 쏘아올린 조명탄과 항공기 지원 조명탄의 낙하산들이 간밤의 치열한 격전을 설명하듯 온 지면을 덮고 있었다. 

지상에 내려와보니 외곽교통호 주변에서 병사들이 월맹군 병사 시체를 판초에 올려놓고 시체들이 가득히 쌓여있는 매몰장소에 던져 넣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AK47 자동소총을 비롯한 대전차 총류탄 등을 회수하고 있었다. 적이 침투했던 전방에서 시체와 병기를 찾아 정리하는 병사들 모습도 보인다. 맹호 부사단장은 외곽교통호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월맹군들이 파놓은 경기 좌사호와 수북히 쌓인 탄피를 가르키면서 주변에서 바라보는 9중대원들에게 “적이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생명을 걸고 싸운 월맹군들의 용기는 우리들이 배울만 하다”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미군이 9중대에 파견한 탱크 M48A3 전차 두대가 지형이 약간 높은 지형 위에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월맹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하한 월맹군 병력은 야드랑 계곡을 통해 월남 중부 지역에 침투하려면 3대대 전술 책임구역을 지나가야만 했다. 3대대는 소강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포대의 요란사격 지원을 받으며 주로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정찰활동만 했다. 부대가 이곳에 이동한 지 한달되는 8월 9일도 9중대 2소대는 정찰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흰손수건: 밤에 안보이니까 조명탄을 쏘면 낙하산에 조명탄을 매단다 . 흰손수건은 조명탄을 달고 내려온 낙하산을 의미한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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