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동정을 수색하고 있는 기갑연대 3대대원

2부: 재개입하지않는 미국과 나약한 월남정부
흑암에 덮인 밤. 매설해놓은 조명 지뢰하나가 터젔다. 적진은 보이지 않았다. 외곽교통호에서 보초 한 명이 전방에서 삽질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보고했다. 탱크에서 조명등을 비치자 적의 모습이 보였고 10시 40분경 적의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면서 박격포탄이 9중대 진지 안에서 작렬했다.

적은 박격포와 기관총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철조망을 뚫고 진지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치열하게 공격해왔다.

포대에서는 주로 조명탄을 쏘고있어 필요한 지원사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았다. 잠시 후 지원나온 항공기에서 조명탄을 투하하면서 전방이 더욱 밝아졌고 포대의 지원사격이 정확하게 적진을 때리기 시작했다.
중대장 이춘군 대위는 즉각 전차의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미 3여단에서 지원나와있는 전차 두 대에서 맹렬한 지원사격이 시작되었다. 9중대원들은 전방에서 침투해오는 적병들을 자동소총, 기관총 그리고 M1소총으로 맹렬하게 사격했다.

파월군, 월남공화국 평화위해 생명걸고 싸워
전차 한 대가 조명등으로 적의 위치를 포착하면 다른 전차가 바로 조준하여 사격했다. 두 전차가 조명과 사격을 번갈아 적 방향에 맹렬하게 사격을 가했다. 사격에 주로 쓴 포탄은 90mm 포와 산탄이다.

산탄에는 산탄 500개가 들어있어 탄착점에서 폭발하면 산탄이 주변에 퍼져 적병들을 사살했다.

적의 기관총 사격이 심해서 2소대원들은 머리를 들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전차에서 50mm 구경 기관총으로 지원사격 해주어 2소대원들의 사격이 용이하게 되었다. 포 지원 사격으로 적의 전열이 흐트러졌고 3시 경에는 박격포 사격이 수그러들었다. 월맹군은 새벽 6시까지 다섯 차례나 공격해왔으나 9중대의 완강한 반격으로 모두 후퇴했다. 이 날 공격해온 적은 월맹군 제88연대의 2개 대대병력 700여명으로 9중대를 공격했다.

전과는 사살 187명, 6명 생포, 박격포와 전차포 17문, 기관총 및 자동소총 82정 노획.

아군 피해는 전사자 6명, 부상자 42명.

대한민국이 한국전쟁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을 위시한 국제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빚이 있는 파월군 5만명의 장병들은 월남공화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생명을 내걸고열심히 싸웠다.

1973년 3월29일.  미군 베트남에서 철수
미국 성조기와 사령부기를 든 병사들 뒤에 장교단이 대열을 정비하고 서 있다. 폐쇄식장 앞 플랫폼에는 마틴 미국대사와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이엔드 대장이 서 있다. 세계 각국에서 미군철수와 주월 미군사령부의 폐쇄식을 취재하러 온 기자단들이 모여들었다. 

베트남 고용인들은 사무실 유리창너머로 근심스러운 얼굴로 미군 철수의 최종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사령관은 끝까지 남아있는 장병들과 기자들에게 “미국 군인들은 명예스럽게 베트남의 평화를 이룩했다” 라고 짤막한 연설을 하였다. 게양대에서 사령부 기가 내려졌고 병사들이 기를 접었다. 12년간 50만명 이상이 전쟁에 투입되었고  58,315명의 전사자를 낸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직사포대 대원들이 진지를 방어하고 있다

1974년 9월 2일. 가장 맹렬한 공방전의 벤켓마을 동정
사이공에서 13번 국도의 북쪽 40킬로 떨어진 벤켓마을 주변에서 작전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월맹군 9사단이 사이공에 장거리포와 로켓공격에 유리한 전초기지로 이 벤켓 마을을 확보하기위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을 방위하고 있는 월남군 제5 사단은 정전협정이 이미 발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월맹군은 벤켓지역 확보를 위해 새롭게 공격해왔다고  주장했다.

벤켓 주변의 교전은 월남 전역에서 가장 맹렬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 정부군은 주로 포사격을 하여 월맹군의 전진을 봉쇄하고 있다. 정부군은 최근 교전에서 월맹군 75명을 사살했으며 정부군측의 피해는 26명 실종, 전사자 1명, 부상자 9명이었다. 양측이 휴전협정의 유리한 입장을 만들려고 하는 듯 보였다.

9월 들어 월맹군은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사단 규모의 작전으로 전술을 바꾸고 있다. 벤켓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이나 북쪽도 같은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벤켓마을 거리는 사람들의 장사하는 모습으로 태평스럽게만 보였다. 여자 상인이 사탕 수수대를 기계에 넣어서 짜낸 즙을 병사가 마시거나 빠에서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맥주를 마시고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행인의 모습. 수도 사이공 40 킬로 문턱에서 벌어질 전쟁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헤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단지 길 가에 세워놓은 탱크 옆에서 한 병사가 상자에서 포탄을 꺼내어 탱크에 싣는 모습, 간간이 적 포탄의 작렬하는 폭음이 사방으로 퍼지며 고요를 깰 때 지휘관 장교가 쌍안경을 들고 사방을 살피는 모습, 호 속에서 긴장하고 있는 병사들 모습 등이 전쟁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1975.1.2. 푹롱성 함락
하노이 군 수뇌부는 푹롱을 공격하여 사이공 정부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푹롱은 사이공 서북쪽 캄보디아와 월남 국경에 위치한 성(행정단위로서 우리나라의 도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으로 호치민 루트에서 수도 사이공에 이르는 요지이다.

푹롱성 주변고지를 점령하고있던 월맹군은 130미리 포로 푹롱성 내의 주요 군사시설과 행정기관을 포격하고 1월6일 푹롱성 전역을 점령했다. 월남 연합사령부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푹롱성 탈환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단지 정보수집을 위해 공수특전단의 병력 300명을 긴급히 투입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이 병력은 정글 속에서 모두 소멸되었다.

월맹 지도자들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74년 8월 상순에 사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월맹군이 푹롱성을 공격하여 장악한 것은 분명히 파리 평화협정의 위반이다. 닉슨 대통령이 티유 대통령에게 월맹이 평화 협정을 위반하면 바로 미국도 병력을 보내어 군사활동을 재개하겠다고 한 약속을 닉슨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월맹지도자들은 휴전협정을 지키지 않아도 미국이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과 월남정부의 연약함을 읽은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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