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누트 공항 당시 모습

4회에 걸친 월남전 참전 종군기자 출신 호주 동포 김동규 선생의 월남전 참전기 마지막 회입니다. 그동안 관심있게 구독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註).

두옹반 민 대통령은 임시혁멱명정부(베트콩)와 월맹과 협상 끝에’ 대 국민 방송’을 합의했다.

“모든 병사들이여!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말고 발포하지말기 바랍니다. 그래야 피흘림없이 정부이양을 함께 협의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평화와 화해 및 일치를 위해 그리고 국민들의 생명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간의 화해를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월남공화국 병사들이 현재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 것을 호소합니다. 또한 임시혁명 정부의 병사들도 발포하지말 것을 호소합니다”.

연합사령부 소속의 웬 후 한 장군은 임시혁명정부의 협력자이기에 국외망명을 거부하고 베트남에 잔류, 월남군이 존재하는 몇 시간동안 정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4월 30일 10시 30분에 그는 사이공 라디오를 통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명령을 했다. 
“월남군 병사들이여! 그대들이 만나는 처음 임시혁명정부군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라”.

월남은 왜 패망하였나(1) 농민들의 농토배분 거절
고 딘 디엠 대통령은 소작 농민들이 간절히 요구하는 농토배분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불교도들을 불공평하게 다루었다.  농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함정에 빠져 반정부 무력항쟁 집단세력(베트콩)에 참여했다. 1969년 6월 9일 베트콩들과 도시의 반정부세력들은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하고 월맹이 지원하는 무기로 무장하고 전국 각지에서 반정부 무력항쟁을 했다.

베트콩 소탕작전에서 미군은 고엽제와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베드콩들이 침투해있는 농촌의 농민생활 환경을 훼손시켰고 베트콩 동조자들은 증가했다.

1972년 냉전상태에서 공산권과의 긴장완화가 새로운 정세변화를 가져와 미국은 월남정부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보다 정세변화의 새 국면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성과는 없이 오래끄는 전쟁에 지친 미 국민들은 반전무드로 전환,  파리평화협상과 미군철수를 이끌어냈다. 

월맹이 평화협정을 위반하면 공습 재개를 하겠다고 한 티유대통령과 닉슨대통령과의 약속은 닉슨 사임으로 이루어지지않아 결국 월맹군 총 공세를 막아 내지못했다.

월남시민들과 언론 그리고 종교단체들은 국론 통일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정부를 돕지 못하고 월남 임시혁명정부 선전과 유도에 넘어가 반정부 활동을 강화했다.

월남전 당시전투모습

(2) 미군들의 농촌 환경훼손 
군사적으로는 50만 미군이 철수한 다음 월남군은 전술과 작전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고 미군지원 하에서 작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장거리 정찰 활동을 통해 적군의 움직임을 미리 탐지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리고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병력 수송이 아니라 파괴된 도로망과 교량을 수선하여 트럭으로 병력을 수송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헬리콥터와 수송기는 부속품과 유류부족으로 사용치 못했다. 병력배치는 주로 도시 중심으로 일선 배치, 일선이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예비병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월맹군은 천 킬로가 넘는 먼 길을 행군으로 피곤해진 병력들이 남부월남에 침투해오니 타격기동부대가 이동, 침투를 봉쇄할 수 있었다. 2군단지역에 주둔하고있던 기갑연대 3대대의 둑호 방어작전이나 한국군 보다 일년 앞서 미군 제 1기갑사단의 야드랑 계곡에 침투하려는 월맹군을 미리 구적필열 작전으로 섬멸, 성공한 작전은 월맹군의 침투를 막아낼 수 있었던 성공사례다. 월남군은 이런 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 군 체질개선 실패 및 국론분열 
반미토 작전의 실패는 캄보디아 국경에서 침투해 온 월맹군 5개사단 중 3개사단의 움직임을 미리 정찰하지않아  적의 주 공격 목표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적은 반미토로 향하는 14와 21번 도로에 잠복하여 병력 수송을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게다가 연합사령부와 2군단과의 작전 협력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있는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지상군과 공군 비행대와의 작전통제가 되지 않았고 공군은 우군 전방사령부 통신시설을 폭격했다. 티우 대통령은 계획없이 2군단 병력을 철수시켜 월남 패망의 날을 앞당겼다.

파리평화 협정조인 이후 월맹은 2년간 착실히 준비했지만 월남정부 측은 군 체질을 개선하지 못했으며 승리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

철모에 귀국일을 적은 미 육군 공수부대원사진

패전으로 국민들은 무엇을 얻었나?
2군단장은 플레이쿠(Pleiku)와 콘툼(Kontum)에서 정규군 병력을 비밀리에 철수토록 명령하였으나 시민들도 아무런 준비없이 군단병력 철수행렬에 뒤따라 나섰다. 40만명의 피난민들이 행군도중 월맹군의 공격과 기아로 사망, 40만명 중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겨우 10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곳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또 끝없는 피난 행렬에 끼어 떠나야 했다. 언론과 베트콩과 종교단체에서 그토록 떠들어댔지만 시민들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목숨을 걸고 삶의 터전을 떠났다.

4월 하순이 되자 사이공 시민들의 동요는 극에 달했다. 고급주택을 75% 할인 판매하려고 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미국비자는 받을 수 없었다. 월남여권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시민들 11만명이 해외로 떠났다. 탄산누트 공항 활주로에 포탄이 떨어지기 전까지 민간 항공은 운항되었지만 항공기 탑승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사이공 항에 정박해 있는 배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미국기관에 근무했던 베트남 사람들과 가족 7천여 명은 미 대사관의 피난계획에 따라 미대사관에서 헬리콥터로 동해안에 정박 중인 미함대에 수송되었다. 월남군인 가족들도 베트남 헬리콥터로 미 함대에 피난했다. 함정 갑판 위에 헬기를 실을 여지가 없어 피난민들이 내리고난 다음 헬기는 밀어서 바다에 떨어뜨렸다.

작은 어선으로 태국, 말레이지아 그리고 호주를 향해 먼 거리를 항해하는 동안 많은 배들은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귀중품과 금품을 털리고 젊은 엄마들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피난가지못한 공무원, 군인, 베트콩 동조자들 그리고 밀정들까지 모두 40만 명의 사람들이 전국 40개의 재교육시설에 수용되어 길게는 17년까지 복역했다. 복역 후 이들은 공산당 핵심 고위직에 들어 갈수는 없었다. 

국론의 분열과 내부혼란을 불사하는 사람들이 안전, 행복, 평화, 자유를 주는 귀한 삶의 보금자리를 앗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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